오늘은 '12년 전 트레이닝복'을 버립니다.

2009년 걸어서 출퇴근을 결심할 때 바람막이로 걸치려고 샀던 그 옷

by jim

몇 주 전부터 주말같이 조금 삶을 돌아볼 수 있을 만한 짬이 생길 때마다 물건을 버리면서, 그 물건과 관련된 소소한 기억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보물상자(?) 같은 서랍장 하나를 털어서, 거기에 숨겨져 있던 각종 오래된, 더 이상은 쓸 수 없는 전자기기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런 잡다한 물건들 보다는 옷장에 오래도록 쌓여있는 옷가지를 정리하는 것에 많은 분들이 더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제가 적는 글들은 실력 없고, 재미도 없는 글뿐인지라 구독자나 조회수에 크게 신경은 쓰지 않지만, 바래져 버린 흰 티 여러 장을 정리했던 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옷장 한쪽 귀퉁이에 비슷한 물건들이 있으셔서 그런지, 제법 많은 분들께서 읽어주시고 무려 서너 개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습니다. 각자 '다 다른 모습과 방법'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결국은 비슷한' 물건들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공감대가 생기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겠죠.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글'을 써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는 소재'를 찾아보는 것은 꽤 솔깃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전자제품 서랍에 버릴만한 물건이 제법 남아있는 것 같지만, 오랜만에 다시 옷장을 열어보기로 했습니다.


자주 입는 옷과 자주 입지 않는 옷, 가끔 그래도 TPO를 맞추기 위해서 하나씩은 챙기고 있어야 할 옷들. 수많은 옷가지에서 버릴만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옷을 골라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작년부터 근 2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사실상의 사회적 교류가 거의 단절되어버렸기 때문이죠. 지금 2년을 기준으로 라면 출퇴근할 때 입는 트레이닝복과, 사무실에서 근무 중에 입는 옷가지 몇 종류, 종목별 운동복 들을 제외한, 각종 셔츠, 재킷, 코트 등은 모두 버려야 할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이 영원할 것도 아니고, 지금 위드 코로나 정책이 검토되고 있는 이 시점에 그런 옷가지들을 다 버릴 수는 없겠죠. 그래서 자주 입는 옷, 트레이닝복으로 카테고리를 좁혀서 그중에 꺼내지 않는 옷을 추려보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결혼하고 살림을 꾸리면서 차량을 늘리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최소한 성인가족 수, 아니면 그 이상의 차량을 보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맞벌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고요. 서울과 같은 대도시 한복판 역세권에 살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장이라도 한번 보려고 해도 차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가능한 한 제 일자리에서 가까운 쪽으로 집을 구하고, 5km 이내는 제가 걸어서 출퇴근을 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출퇴근 거리가 10km 정도 된 적도 있었는데, 다행히 대중교통이 잘되어 있는 곳이어서 마음이 바쁜 출근길은 대중교통으로 다니고, 날씨가 좋은 계절이면 퇴근시간에는 살랑살랑 뛰다 걷다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옷장에서 10년도 훌쩍 넘은 나이키 바람막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가슴부터 어깨까지 v자 형태로 색깔이 구분된, 단순한 디자인의 후드 집업 형태 트레이닝복이죠. 이 옷을 샀던 곳은 어느 한 백화점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일자리를 한번 옮기고서, 걸어 다닐만한 거리가 되길래 봄, 가을 제법 쌀쌀한 출퇴근 길에 바람막이 형태로 걸칠만한 윗도리를 하나 고르던 참이었죠. 그러고 보면 지금은 전국 여기저기에 각종 아웃렛이 많은데 2009년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아마 여주 아웃렛 하나 정도 있었을까요. 요새는 나이키 신발 같은 것을 사면 집에서 멀지 않은 적당한 아웃렛으로 가서, 거기서 팩토리 형태의 대형 매장에서 적당한 가격으로 할인 중인 상품을 하나 집어 들고 나오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여기저기 매장이나 백화점을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백화점'에서 옷을 산 게 언제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이 옷은 크게 세련될 것도 없지만, 크게 유행을 타지도 않는 디자인 탓에 오래도록 잘 입었습니다. 사실 수년간 똑같은 디자인에 컬러 조합만 다르게 해서 나이키는 계속 신상품을 내고 있죠. 같은 디자인의 색상과 소재만 다르게 한 트레이닝복을 아내도 이후 몇 번 더 구매했었고요.


이 옷을 입고 출퇴근이나 야외활동에 가볍게 걸치기만 한 것은 아니고, 트레이닝복 하의와 함께 입고 봄가을 쌀쌀한 아침 시간 조깅을 하기도 했고, 어디 여행이라도 갔을 때는 호텔 카페테리아에 조식을 먹으러 갈 때 후드까지 머리에 걸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국 방방곡곡, 지구 구석구석을 오래도록 같이 다닌 추억이 많은 옷입니다.


성인이 된 이후에 산 옷들이 다 그렇지만, 크게 사이즈가 달라져서 못 입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옷이 상하거나, 유행이 크게 바뀐 경우가 아니면 계속 옷장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죠. 그런 옷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정리했던 흰 티셔츠부터, 흰색과 같이 무난한 컬러의 셔츠나 블라우스 종류들, 청바지, 그리고 트레이닝복 종류들이 보통 그렇죠. 이 옷도 몇 년 전부터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오래도록 이런저런 기회에 잘 입고 다녔지만, 어느 순간부터 손이 안 가게 되었죠. 어릴 때처럼 더 이상 작아져서 못 입게 된 것도 아니고, 어디 넘어져서 찢어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 생활패턴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말이죠. 가급적 10km 이내는 차량보다는 걸어 다니고,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면 TPO 범위 내에서 가급적 편안하게 챙겨 입고, 고가의 명품보다는 가성비가 좋은 적당한 제품과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은 그대로인데 말입니다.


요즘 출퇴근 길에, 운동할 때 자주 걸치는 옷가지들과 비교를 해보니,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트레이닝복의 소재가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옷도 2009년 당시에는 아주 가볍고 간편한 소재의 옷이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샀던 바람막이나 트레이닝복들은 정말 더 가볍고 더 간편해졌더군요. 오랜만에 이 옷을 다시 걸쳐보니, 생각보다 묵직하고, 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근래에 구매한 트레이닝복은 나이키, 아디다스와 같은 전통적인 스포츠웨어 브랜드에서만 산 것이 아니더군요. 요새는 트레이닝복 브랜드도 다양하고, 스파 브랜드에서도 기능성 소재를 가지고 편한 옷가지들을 많이 내놓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 옷은 10년 이상 오래되다 보니, 밝은 색 부분은 조금 바랜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소위 '후줄근'해 보였습니다. 소매단에 있는 작은 구멍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봄가을 쌀쌀한 날씨에 편하게 걸친 옷이다 보니 아마 캠핑장에서 작은 불씨가 튀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 적 캠핑이었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했습니다. 아마 친구들과 진탕 술에 취해서 작은 불씨가 팔에 앉은 줄도 몰랐겠죠.


작년,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막 강화될 무렵,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도 해서, 집 근처에서 달리기를 많이 했습니다. 운동을 많이 하다 보니 아무래도 운동복이 조금 더 필요했고, 적당한 옷가지들을 조금 더 구매를 했었죠. 그러다 보니 평상시에도 편하게 걸칠 수 있는 옷가지 종류가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서 조금 무겁고, 조금 오래된 이 옷은 점차 손이 덜 가게 되었습니다. 아마 올해에는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다른 옷가지들이 조금 늘어나다 보니 아마 이 옷을 더 꺼내 입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버리기로 했습니다. 12년이면 버릴 때가 지난 것 같기도 하고요. 집에서만 편하게 입기에 후드가 달랑거리는 옷은 잘 때 입기에도 조금 불편한 감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버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운동복이라는라는 게, 사이즈가 갑자기 안 맞을 일도 별로 없고 해서 한번 사면 오래도록 옷장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으면 된다'는 핑계로 잘 버리지도 않게 되곤 합니다. 최근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적인 유행으로 인해 헐렁한 디자인의 녹색 트레이닝복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집 앞 산책할 때에도 가슴에 숫자 표를 붙이고 있는 녹색 저지를 실제 보기도 했습니다.


트레이닝복을 버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인기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고, 시즌2에 같은 옷을 입고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고, 기능성 소재도 아닌 저 옷을 지금 굳이 누군가는 팔고, 또 누군가는 사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생각보다 유통기한이 짧은 옷가지일 텐데 말이죠. 월드컵 때마다 비슷한 듯 새로운 로고를 가슴에 새긴 붉은 악마 티셔츠가 유행을 합니다. 그 옷을 입고 응원을 해야 월드컵에 동참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죠. 그리고 월드컵이 끝나면 - 심지어 빨간 옷을 좋아하는 사람도 - 그 옷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 로고 때문에 입고 싶었던 옷인데, 그 로고 때문에 더 이상 입지 못하게 되는 격입니다. 어쩌면 오징어 게임 트레이닝복이 제2, 제3의 붉은 악마 티셔츠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또 전 세계 어디엔가는 버려지는 녹색 운동복이 쌓여가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지나칩니다.


필요한 물건만 사고, 필요한 물건만 팔기에는 우리는 너무 많은 미디어와, 그 미디어 속 광고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꼭 필요하지는 않은 물건을 만들고, 또 누군가는 '필요할 거야', '필요한 거야'라는 메시지를 만듭니다. 그렇게 수요와 공급, 판매와 구매의 바퀴가 돌아갑니다. 신제품이 나오는 만큼 어딘가에 쓰레기도 쌓여갑니다. 당분간은 집에 새로운 것을 들여와서 쌓아두기보다, 손이 닿지 않고 있는 것들을 덜어내는데 관심을 더 두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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