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간 입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입을 일 없을 옷들
지난 주말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불필요한, 쓸모없는 물건들을 찾아서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삶의 무게를 덜어 내듯, 허리춤에 쌓여있는 지방살을 빼내듯, 그런 마음으로 말이죠.
초보 미니멀리스트에게 생각보다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 '버릴 이유를 만든다'거나, '버릴 만한 것을 찾는 것'이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괜히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 만 같고, 아주 작은 쓰임이라도 있을 것 같으면 일단은 가만히 두어도 무방하니 말입니다.
크고 작은 짐들이 쌓여있는 창고로 변해버린 베란다에 들어가면 일단 일이 너무 커질 것만 같아서 오늘은 옷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아내가 옷 종류별로, 셔츠면 셔츠, PK티는 그것들 대로, 반팔 면티는 색상별로 따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티셔츠들은 같은 색상의 옷 더미에서 맨 위에 있는 가장 마지막에 구매했거나, 최근에 세탁해서 정리해둔 옷 위주로 입고, 아래쪽에 쌓여 있는 옷들은 언제 입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더군요.
마치 탑처럼 가장 높이 쌓여있는 흰 티셔츠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저기 받쳐 입기 좋다 보니 그 수가 늘어난 것이겠죠. 딱히 스타일이랄 것도 없는 흰 티셔츠들이다 보니 아마 오래되었다고 딱히 버릴 이유도 없었기에 계속 늘어만 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래쪽부터 몇 벌을 꺼내보았습니다. 오랜 옷장 냄새가 살짝 올라오면서 최근에 세탁해서 맨 위에 쌓인 옷과는 톤이 살짝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렇게 색이 바래 있더군요.
바로 입으려면 세탁을 다시 해야 하고, 세탁을 하고 다시 정리한다고 해서 바로 입을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고. 아마 계속 이런 과정을 거치다가 이렇게 몇 번의 이사 이후에도 계속 옷장 한 켠 아래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장, 한 장 펼쳐보니 사실 언제 입었는지 기억도 안나더군요. 유일하게 프린팅이 있는 티셔츠 한 장은 하와이에서 여러 장에 10불 주고 샀던 서핑보드 프린팅 티셔츠 더군요. 따뜻한 남쪽나라에 여행을 갈 때면 거의 물에서만 지내다 보니 옷가지를 제대로 안 챙겨가고 그 동네에서 '적당히 입다가 버릴' 요양으로 저렴한 반바지, 반팔을 구매하곤 합니다. 그렇게 적당히 입다가 버릴 요양으로 샀던, 면도 그리 좋지 않아 뻣뻣하기만 했던 티셔츠가 계속 따라다닌 지 벌써 7년이 흘렀다니, 그리고 사실 여행 이후로 몇 번 입은 적도 없다고 생각하니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 것 아닌 라운드 반팔 티셔츠도 나름 유행이 있기는 합니다. 언젠가 샀던 셔츠는 조금 헐렁하니 오버핏 느낌으로 박시하고, 언젠가 샀던 티셔츠는 슬림하게 허리라인까지 툭 떨어지더군요. 같은 색상이지만 이 티셔츠는 이런 바지랑 맞춰 입어야 될 것 같고, 이건 저 바지가 맞을 것 같고. 색 바랜 티셔츠를 만지작 거리다 보니 갑자기 또 '꼭 버려야 되나', '일단 그냥 둘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했습니다. '오늘 하루 정도는 변화 없이 어제처럼 살아도 되고, 내일 하루 정도도 오늘처럼 살면 되겠지만, 내년 이맘때쯤, 10년 후 이맘때쯤에도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당장 바꾸는 편이 낫다'는 것이죠. 예전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이나, 부대에서 군인들이 휴대폰을 사용하지 못했었죠. 이미 온 국민이 휴대폰을 들고 다닌 지가 20년도 넘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나 군인들이 휴대폰을 사용하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러한 문제가 있으니 일단 지금은 금지'라는 하루하루, 일 년 이년의 의사결정이 계속 쌓이고 미루어져서 20년이라는 시간을 만든 것이었겠죠. 아마 '초등학생들도 들고 다니는 휴대폰을 10년 후에도, 아니면 영원히 못 쓰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처음부터 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지 않을까요. 하지만 사실 '일단 나중에 고민'하는 게 편하기는 하죠.
색 바랜 티셔츠를 보면서, 지난 수년간 입지 않았던 것들을 하나씩 추려냈습니다. '일단 나중'으로 미뤄두기보다 지금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내년 이맘때쯤 이 옷이 여기 그대로 쌓여 있을 것' 같다면 버리고, 꽤나 입을 것 같다면 세탁함에 넣기로 말이죠. 하와이에서 사 온 티셔츠가 눈에 꽂혔습니다. 지난 7년간 두어 번도 채 입지 않았던 티셔츠 말입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주말 아침부터 시간을 들여 고민할 문제는 아니더군요. 일고 여덟 벌 정도 챙겨서 버렸습니다. 괜히 걸레로 한번 쓴다는 핑계로 처박아 두어 봤자 또다시 세탁함을 거쳐 실수로 옷장까지 기어올라올 수도 있을 것만 같아 바로 버렸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옷장에 흰 반팔티는 적잖게 쌓여있더군요. 결국 살아가는데 큰 의미가 없었던 물건을 그냥 가지고만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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