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전 전에는 여유가 넘쳤던 것인지
역시나 여느 주말처럼 늦잠을 잔다고 해도 해가 오르기 전에 잠에서 깹니다. 오늘은 또 뭐 버릴 만한 것이 없나 기웃거리다가, 자그마한 잡동사니가 모여있는 서랍장이나, 옷장보다는 새로운 것들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확장형 아파트의 경우에는 다들 상황이 비슷하실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수납공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는 베란다가 거의 창고처럼 변해버리곤 하죠. 확장하지 않은 옛날 아파트 구조, 그러니까 거실에도 널찍한 베란다가 나와있는 구조에서는 거실에서 베란다가 잘 보이기도 하거니와, 공간이 넓다 보니 이런저런 용도로 제법 사용하기도 해서 정리를 좀 하고 사는 편인데, 일부 방에 자그마한 베란다가 억지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에는, 이런저런 둘 곳 없는 짐을 쌓아 놓다 보면 결국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곤 합니다.
베란다. 사실 판도라의 상자 같은 곳이어서 쉽사리 문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오늘 아침은 해가 오르고 나니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이 예쁘기도 해서, 창밖 구경이라도 할 겸 커튼을 헤치고 베란다 문을 열었습니다. 눈에 확 띄는 큼지막한 박스가 하나 보이더군요. The Beer Machine. 재료를 레시피대로 잘 넣고 밀폐한 다음 한 두 달의 발효 및 숙성기간을 거치면 그럴싸한 수제 맥주가 완성이 되는 키트입니다.
언제 샀더라, 먼저 생각해 봅니다. 신혼 초, 결혼한 지 아직 몇 해가 되지 않아 이것저것 호기심이 많던 시절, 2009년 즈음에 구매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몇 번이나 썼더라, 다음에 생각해 봅니다. 아마 첫 해에 함께 구매했던 재료들을 가지고 열심히 몇 차례 쓰고, 그다음 해 정도에 한두 번 더 썼었던 것 같네요. 그럼 언제 마지막으로 썼더라, 떠올려봅니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확실한 건 2010년대 초중반부터 삶이 생각보다 많이 바쁘고, 고달파지면서 이런 고상한(?) 취미는 더 이상 거들떠볼 수 없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러다 보니 10년째 이삿짐과 함께 이 집 창고에서 저 집 창고를 전전하고 있는 신세가 되었죠.
이 물건의 연대기를 살펴보니 '세상 물정을 모르던 탓에 제법 여유 부리며 살만하던 시절'에 덜컥 집에 들였다가, '사회의 쓴 맛을 알고, 잠잘 시간 도 없이 1분 1초에 쪼들려 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물건이더군요. 직장생활 근 20년, 하루에 대여섯 시간 잠잘 시간도 없고, 위아래로 몰아치는 갖은 업무와 요구를 해결하다 보면, 어디 아파도 병원도 제대로 갈 수 없는 이 시기에, 한두 달을 기다려야 하는 수제 맥주는 완벽한 사치가 맞습니다. 금액이 아니라 시간적인 사치인 것이죠. 지금의 팍팍한 삶에는, 게다가 코로나19까지 보태진 시기에는 금요일 저녁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려 한병 달랑거리며 들고 나오는 녹색 소주병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사회적인 분위기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기억이 납니다. 2000년대 중후반에 가장 유행했던 키워드는 '웰빙'이었죠. 다들 잘 먹고 잘 사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2020년대에 들어 집값 폭등, 인플레이션, 헬 등의 키워드가 유행하고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분위기가 달랐죠.
이 물건은 별로 구조가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직도 동일한 제품을 10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에 팔더군요. 제가 10년도 더 지난 당시에 10만 원이 조금 안되게 샀던 것으로 기억을 하니, 생각보다 가격이 많이 오르지는 않았네요. 사실 흔치 않은 물건이니 이 정도 가격으로 거래가 되는 것이고, 실제 구성품을 살펴보면 별로 대단한 것은 없습니다. 재료를 넣고, 한 두 달 동안 잘 밀폐시켜 놓을 수 있는 플라스틱 통과 각종 고무 패킹들이 전부이거든요.
수제 맥주 기계라고 해도 사실 이 제품은 맥주의 원 재료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이 제품 전용으로 나온 분말형태의 재료가 있거든요. 레시피에 맞게 재료와 물을 잘 섞고 그냥 두면 됩니다. 그러면 시간이 다 해결해 주죠.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내가 직접 만든다'는 느낌이 크지는 않습니다. 인터넷으로 집에서 수제 맥주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면 이런저런 다른 방법들도 제법 많이 나옵니다. 동호회처럼 모여서 하시는 분들들도 있고, 어디 모여서 수업 식으로 진행되는 것도 있고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제품은 전용 분말재료를 사용하다 보니, 맥주의 플레이버도 - 편의점에서 세계맥주 고르듯이 - 사실 그 안에서 선택하는 것이고,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폭이 제한적이면서, 계속 특정 가격대의 원료를 구매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맥주는 탄산이 강하고 향이 강하지 않은 특징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맵고 짠 음식에 플레이버가 강한 맥주는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차피 다들 소주를 섞어 마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폭탄주를 염두에 두고 맛을 일부러 떨어뜨렸을 수도 있고요.
다양한 맥주를 많이 접해볼 수 있는 것은 영국에서 연수를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교육시설 근처에 있던 펍에서는 영국식 에일을 비롯해서 아일랜드 기네스 등 이런저런 맥주를 팔았습니다. 당시 맥주에 관한 몇 가지 인상적인 기억이 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 동편의 기네스보다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마시는 기네스가 훨씬 향이 풍부했고, John Smith라는 아주 부드러운 맥주를 당시 외국인 친구들과 자주 마셨고, 런던의 자랑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London Pride는 생각보다 별로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유럽 섬나라에서 외국인 친구들과 마셨던 맥주는 탄산이 별로 없었고, 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식사와 맥주를 곁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식사 후에 펍이나 바에 잠시 들려서 별도의 안주 없이 맥주 한두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에 들어가는 식으로 맥주를 즐겼었죠.
탄산이 제법 있는 맥주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이네켄, 칼스버그 정도였고, Foster라는 맥주도 있었는데, 그들 말에 따르면 맛은 없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시원한 탄산 맛에 어린 친구들이 많이 마신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카스와 하이트에 익숙해져 있던 저는 연수 초반에 이 Foster를 주로 마셨기도 했고요.
집에서 이 기계를 가지고 수제 맥주를 만들면 우리식 맥주가 아닌 유럽식 맥주가 나옵니다. 발효 방식이나 이런저런 종류에 따라 라거, 에일, 필스너 등등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카스, 하이트와 같은 라거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넣는 재료의 종류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제대로 만들어졌던 것들은 주로 에일 종류였습니다. 탄산이 별로 없고, 조금 묵직하면서 텁텁하기도 한, 그렇지만 향이 풍부한 맥주죠.
퇴근 후에 짜릿하게 원샷으로 뒤통수를 강타하는 탄산 맛을 즐기기 위한 맥주보다는,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부드럽고 쌉쌀한 목 넘김을 조금씩 즐기기는데 적절한 맥주가 나옵니다. 탄산을 더 넣으려면 탄산 카트리지를 쓰거나 별도 병에 병입을 해서 2차 발효를 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도 하죠. 맥주가 만들어지면 기계 앞에 있는 레버를 통해서 맥주를 바로 따라 마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원하게 마시기 위해서 이 수박 한 통만 한 녀석을 냉장고에 통째로 넣어두어야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살림집 냉장고라는 것이 사실 살다 보면 아무리 커도 절대 텅텅 비지는 않는 물건인데, 거기에 이 큼지막한 물건을 위해서 한 칸을 통으로 비워야 하니까요.
바쁜 삶이 아니라고 해도 이 제품을 더 이상 쓰지 않은 이유가 또 있습니다. 알코올을 만들어 내는 발효의 과정이라는 것이 미생물에 의한 아주 과학적인 과정입니다. 아주 청결해야 하고, 제대로 밀폐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계속해서 쉬지 않고 맥주를 만들어 마시면서 제품을 관리하면 모르겠지만, 1~2년에 한두 번 정도 가끔 시도할 때에 먼지 가득한 창고에 있던 이 녀석을 깨끗하게 소독해야 합니다. 세척이 아니라 소독이죠. 하지만 스테인리스가 아닌 플라스틱과 고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소독을 하는데 조금 제한이 있더군요. 큼지막한 덩치도 문제고요. 그러다 보니 '적당히' 소독한 후 오랜만에 시도했던 마지막 맥주 제조는 제대로 된 발효가 이루어지지 않고 '망'했었죠.
수제 맥주라는 것은 사실 철저히 과정을 즐겨야만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다양한 풍미의 맥주가 흔해진 시대에 이 복잡한 절차와 번거로움, 그리고 한두 달의 시간을 들여가며 맥주를 만들기는 쉽지 않겠죠. 편의점 캔맥주가 감질난다면, 큰 통에서 바로 마시고 싶은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몇만 원이면 마트에서 큰 케그 한통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 물건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니, 제가 살아가고 있는 라이프 스타일에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제품인 것 같습니다. 주인을 잘 못 만난 물건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생각 없이 무작정 하고 싶은 것을 지르던 저의 20대 후반이 용감무쌍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불필요한 물건을 자꾸 필요한 것처럼, 있으면 좋을 것처럼 보여주는 이 자본주의, 광고주의 사회의 단면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물건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던 것은 아마 '매몰비용'과 '인정하기 어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아내에게 '잘 쓸 거다', '몇 번 이렇게 하면 얼마가 남는 장사다'는 장담을 하고 이 물건을 구입했습니다. 결국 10년이 넘게 흐르도록 그 본전에는 도달하지 못했죠. 나름 몇십만 원 들어간 취미생활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헛돈 들이고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중에'를 기약하며 몇 번의 이삿짐 속에 계속 동행해 왔던 것이고요.
뭔가 마음속 미루어두었던 큰 짐을 덜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굳이 물건이 아니더라도, 업무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이렇게 '일단 나중에 다시 한번 생각하자'며 무작정 미루어 둔 것이 있는지 챙겨봐야겠습니다. 물건을 버리는 것보다, 미루어둔 일거리를, 미루어둔 관계 정리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겠죠. 당장 해결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해결해야 할 리스트'에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물건을 비워나가면서, 삶을 비워나가는 연습을 조금 더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