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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 Jun 20. 2021

섬에 있는 서점

The Storied Life of A. J. Fikry

 원서 제목은 'The Storied Life of A. J. Fikry(피크리씨의 인생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이 책은 '섬에 있는 서점'이라는 번역본의 제목이 더 마음에 듭니다. 주인공 에이제이 피크리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저는 에이제이 피크리씨의 삶이라는 이야기보다 - 같은 이야기로 볼 수 있지만 - 앨리스 섬이라는 자그마한 휴양지에 있는 유일한 책방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거든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쓴, 책을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요즘 복잡한 머리와,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주말이면 눈을 뜨자마자 반드시 해야 할 업무들을 조치하고 틈이 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책을 집어 들고 있습니다. 책 속의 수많은 글자에 파묻히다 보면, 배우는 것도 있고, 깨닫는 것도 있고, 그 무아지경 속에서 잠시 나를 덜어내는 그 기분도 참 좋습니다. 책을 좋아해서 책을 펼쳐보고 있는 분이라면, 이 소설을 무조건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앨리스 섬이라는 곳이 어딘가 실존하는 지명은 아니라고 합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뉴욕에 있는 Ellis Island만 나오더군요. 인근 지역으로 매사추세츠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미국 북동부 어디쯤에 있는 작은 섬을 떠올리며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유럽풍의 건물들이 줄을 서 있는 보스턴 거리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바닷가 휴양지라고 하길래 예전에 며칠 들렸었던 영국 남부의 브라이튼을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각자 상상하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왠지 마이애미나 샌디에이고 같은 열대 휴양지의 번잡함은 그려지지 않더군요.


Brighton, England, 2011.


 영화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집중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일종의 제한이 필요합니다. 예전 재미있게 보았던 미국 첩보 드라마 '24'는 24시간이라는 시간적 제약을 통해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고, 지금 막 머리를 스치는 영화 '부산행'은 여행을 통해 진행되는 '로드무비'라기보다는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을 통해 이야기를 집약하고 있었죠. 어제 보았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같이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는 이러한 '한계'가 없기 때문에 주변 인물과의 에피소드보다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집중된 이야기가 펼쳐지곤 합니다. 반면 일정한 시공간적 제약이 있는 이야기는 조금 더 섬세한 이야기를 꺼내어 볼 수 있죠. 



 앨리스 섬에 있는 피크리씨의 서점을 중심으로 죽은 전 아내의 여동생 가족, 경찰관, 도서납품 영업사원 등 그리 많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단행본 한 권으로 딱 다루기 좋은 적당한 규모입니다. 작가가 똑똑하다고 해야 할까요,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기울인 것 같은 배려가 느껴졌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책을 정말 좋아하는 작가 그 자신과 직접 대화를 하는 듯한 기분도 참 좋았습니다. 정말 많은 책을 '즐겁게' 읽으며 살아오신 분 같았습니다. 소설 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슨 논문을 보듯이 본인이 다른 작품에서 인용한 부분들을 모두 별도의 주석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세심한 배려이자, 다른 작가에 대한 경의의 표시가 아닐까요. 마치 피크리씨와 다른 등장인물들이 이 작품의 작가의 관심사를 대신 표현해주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기억에 남는 멋진 문구들은 해당 원전을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작가가 쓴 책방에 대한 이야기. 이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은 훌륭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즐기는 사람을 앞지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아마 작가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를 쓰려고 하기보다, 본인이 하고 싶었던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이 글을 적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 봅니다.


 책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지만, 책은 이 작품에서 중심 소재일 뿐, 이야기 자체는 The Storied Life, 즉 사람 사는 이야기입니다.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겉으로 보이는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삶과 마음속에 품고 있는 다양한 고민들의 괴리. 이런 것들이 조금씩 겹쳐지면서 나름의 '반전'과 '긴장'도 있습니다. 지루한 책방 이야기라고 책을 펼치지 않으실 분들이 계시다면, 나름의 '범죄, 추리, 수사, 스릴러, 긴장' 이런 것도 몇 % 는 있으니 꼭 한번 펼쳐 보시기를 권합니다.


 일요일 아침. 급한 성격 탓에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사무실에 잠깐 들려 내일 월요일 미리 준비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 지어두고, 아내가 일어나기 전에 '잠시 해변을 거닐다 온' 기분입니다.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네요. 차 한잔 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피크리씨 때문에 책에 재미를 들인 경찰관 아저씨처럼 다른 책을 조금 더 기웃거려 볼까 합니다.




16. 배에서 내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어차피 친구들은 더 이상 휴대폰을 전화 거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기분전환 거리가 생겨 반가웠고, 뜻밖의 상대로부터 걸려온 뜻밖의 전화는 좋은 소식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19. 어밀리아의 어머니는, 소설 따위를 읽으니까 현실의 남자가 눈에 안 차는 거라고 곧잘 얘기했다.


43. 어떻게 침대까지 왔는지 또 옷은 어떻게 벗었는지 기억은 없었지만, 에이제이는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서 잠을 깼다.


70. 에이제이는 구글 검색창에 질문을 넣었다. "이십오 개월 아기한테 무엇을 먹이나요?" 하여 나온 대답은 대체로 부모들이 먹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글이 간과한 건, 대체로 에이제이가 먹는 음식이 쓰레기라는 것이다.


91. 한동안 그네들은 능력이 출중한 여자가 잘못된 결혼으로 고생하는 줄거리의 현대물에 호응했다. 여자에게 어떤 일, 그러니까 자기들에게는 벌어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일이 벌어지면 마음에 들어했다. 여자 주인공을 재고 자르고 판단하는 데서 재미를 찾았다. 자식을 버리는 여자는 도를 넘은 거지만, 남편이 끔찍한 사고를 당하면 대체로 환영이다.


98. 처음엔 이런 게 행복인가 보다 했다가, 이내 이건 사랑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빌어먹을 사랑,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감정인가. 그것은 죽도록 술 마시고 장사를 말아먹겠다는 그의 계획을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제일 짜증 나는 것은, 사람이 뭔가 하나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결국 전부 다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이다.


116. 무엇보다, 어밀리아 로먼은 프로였다. 그 말인즉슨 그들이 처음 만난 날 에이제이의 쓰레기 같았던 태도를 결코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맙소사, 정말 그녀에게 형편없이 굴었다.


119. "모든 단어가 정확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딱 들어갔어요. 이건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이걸 읽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다니 안타까울 뿐이에요."


121. "선생들은 숙제로 내주고, 부모들은 자식이 뭔가 '고급'스러운 것을 읽는다고 즐거워하죠. 하지만 애들한테 그런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니까 애들이 자기는 독서랑 안 맞는 줄 알게 되는 거라고요."


123. "난 술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술은 가족 같죠." 에이제이가 말했다. "가족 '이상'이죠." 어밀리아는 잔을 들어 에이제이와 부딪혔다.


130. "서점 주인이 되는 것에도 나름 영웅적인 면이 있고, 아이를 입양하는 것에도 영웅적인 면모가 있다고요."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뿐입니다."


142. "난 마흔세 살이고, 요즘 들어 사랑하고 헤어지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게 더 좋다는 걸 배웠는데, 또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차라리 혼자가 낫다는 것도 배우게 됐어."


193.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우린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맹세코. 나는 내가 읽는 책을 당신도 같이 읽기를 바랍니다."


202.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삐딱해졌지? 이즈 메이는 생각했다. 저들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아닌데. 아니라야지. 매 순간 이 세상의 행복과 불행이 똑같은 비율로 존재한다면 어찌 되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 나이가 마흔쯤 되면 미움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게 정설이다.


209. "당신은 배짱이고, 나는 개미야. 그리고 난 개미 노릇하는 데 진절머리가 나."


247. "내 경험상, 범인을 알려주면 독자들에게는 더욱 만족스러운 책이 되지."


262.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형 체인 서점이 있는 세상보다 더 나쁜 유일한 세상은, 대형 체인 서점'조차' 없는 세상이었다.


296.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인간은 홀로 된 섬으로 있는 게 최상은 아니다.


308. "근데 세상에 책 쪽 사람들만 한 사람들이 없더라고. 신사 숙녀들의 업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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