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m Jun 20. 2021

철부지 시니어 729일간 내 맘대로 지구 한 바퀴

은퇴 후 60대 아저씨의솔직 담백한세계 여행기

 책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머무는 글이었습니다. 2020년에 발간된 책이니 코로나19로 인한 판데믹을 고려하면 거의 최신 여행기이지 않을까요. 보통 2년 단위 세계여행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기도 하고, 나이를 불문하고 사전에 엄청난 준비와 결심을 하는데 이 책은 그런 '거창함', '대단해 보임'이 없어서 참 좋았습니다. 어쩌다가 불쑥 떠난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싣고, 타보니 좀 아니다 싶어 또 금방 내리고, 집에 돌아갈 법도 한데 발길 닿는 대로 2년을 그렇게 다니시는 모습이 너무 '편안하게' 읽혔습니다.


 책에서 대놓고 본인의 과거 경력에 대해 거의 적고 있지 않으시기 때문에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중간중간 몇 개 등장하는 단어를 놓고 유추해보니 군에서 오래도록 근무하시고 정년퇴직을 하신 분인 것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떠난 여행도 아니고 10년 정도 다른 일을 하시다가 60대 초중반에 이런 여행을 불쑥 떠나시다니, 그리고 그런 결정과 경험을 이렇게 가볍게 풀어내시다니, 그 경륜과 겸손에 저도 모르게 박수가 나옵니다.


 20~30대 청춘의 여행기를 보면 세계의 광활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온 탓인지, 젊음이 모든 감정과 기억을 생생하게 증폭시켜주는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과도함'과 '불편함'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백 년, 수십 년을 더 살아가야 하는데 대단한 깨우침을 터득한 것 같은 결론과, 본인의 모든 선택이 운명적이라고 믿는 단호함이 좀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죠. 이 책은 그런 거품이 없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갑니다.


 물론 서가에서 선뜻 손이 가는 책이 아닐 수 있습니다. 책 표지를 가득 채운 빽빽한(과도한) 텍스트의 제목과, 초등학교 시절 방학숙제로 제출했던 콜라주를 보는 것 같은 표지 디자인, '철부지', '시니어' '맘대로' 등등 약간 올드함이 느껴지는 키워드 등, 표지와 제목만 두고 보자면 굳이 먼저 꺼내볼 가능성이 높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책 중간을 휘리릭 넘겨보아도 그렇습니다. 오래된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것과 같은 저화질 사진에, 명색이 여행기인데도 초점과 구도가 제대로 맞지 않는 사진을 굳이 이렇게 작게 쪼개서 빽빽하게 넣을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간지의 디자인, 폰트 등등 감성 충만 여행 에세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정리하신 여행 일기장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그런데 콘텐츠를 가만히 뜯어보며 읽고 있자면, 그 세련되지 않은 껍데기들도 이 책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생각을 고쳐먹게 됩니다.


 이분의 여행은 이렇습니다. 편도로 출발합니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 거기에서 갈 수 있는 다음 장소를 찾습니다. 그리고 갑니다. 좋으면 좀 더 있고, 별로면 좀 더 일찍 떠납니다. 문제가 생기면 뭐 조금 더 있으면서 다른 할 일을 찾아봅니다. 아등바등 대지 않고, 손을 떠난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끝까지 궁극적인 방향을 놓치지 않는 것. 이것이 경륜이지 않을까요. 


 조금 슬픈 사실은, 이 분도 내적으로 끊임없이 '꼰대와의 전쟁'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세대 간 갈등이야 고대 그리스에도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어'라며 인류 문명과 함께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예전에는 2~3개의 세대가 공존했다지만, 앞으로는 4~5개의 세대가 공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세대'와 '꼰대'의 단순한 대결구도가 아니라, '신세대', '더 신세대', '낀 세대', '꼰대', '꼰대 위의 꼰대' 등등 다차원적인 복잡한 갈등이 발생하지 않을까요. 100살을 살아야 된다면, 어쩌면 가장 중요한 능력은 세대 간의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공감능력이 가장 중요한 역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햇살이 날로 뜨거워지는 6월 하순 어느 일요일 오후. 점심 먹고 나른한 가운데, 졸음을 확 날려주는 상쾌한 청량감 있는 글이었습니다.




22. 여행을 떠날 땐 혼자 떠나라. 함께 가도 혼자 떠나라.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27. 그 누군가가 손을 펴서 내밀면 악수가 된다. 그러나 손을 꽉 쥐고 뻗으면 주먹질이 된다.


41. 꼰대는 항상 남을 가르치려 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꼰대로 살지 않겠다고 울타리 밖으로 나섰는데 제 버릇 개 못주고 있는 내 꼬락서니가 한심했다.


51. 우리나라도 틀에 박힌 광복절, 국군의 날 등의 행사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축제 같은 행사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달력에 빨간색이 찍힌 노는 날, 동원되거나 구경만 하는 행사의 수준에서 벗어나 국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어깨동무하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노래하는 축제의 국경일로 만들 수는 없을까?


54. 네가 언제 인생을 미리 준비하고 조건을 다 갖춰 살았어?


55. 걱정도 가지가지다. 평소에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할 거라면 해보고 후회한다고 했잖아.


64.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넘어가서 속으로 만세를 부르긴 했지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고두고 민망스럽다.


86. 세상의 반은 착하고, 반은 사악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89. 혼자서 오랫동안 여행하다 보면 외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진짜로 여행과 사랑에 빠지면 제대로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오감이 깨어난다. 영감과 상상력이 살아난다. 통찰력과 직관이 생긴다.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버릴 수 있다. 진짜 여행은 객창감을 친구 삼아 다닐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다.


109. 평생 혼자서 잘난 줄 알고 우쭐대며 살아왔기에, 나이만 먹었지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각박했는지 몰랐던 것이다.


129. 불운이 바로 눈앞에 있을 때 행운은 바로 그 옆에 있었다.


135. 내 친구 광호는 "외국에서는 튈수록 박수를 받지만 한국에서는 튈수록 생활하기 힘들어진다"며 멋쩍게 웃었다.


141. 여권을 잃어버렸지만 낙담하기는커녕 진짜 쿠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보너스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155. 그럼에도 한 시간 수업료가 우리 돈으로 7,000원 정도였으니 정말 가성비 최고의 수업이었다. 멕시코에 오기 바로 직전 쿠바를 여행하면서 스페인어를 몰라 잔돈 사기를 자주 당했다.


188. 여행하면서 한국인 여행자들을 만나면 일단 호구조사를 먼저 한다. (중략) 반면 외국인 여행자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나이나 결혼 여부나 전직 같은 것은 본인이 먼저 말하지 않는 한 묻지 않았다. (중략) 정말 내가 부러웠던 것은 나이 따지지 않고 모두가 친구가 된다는 것이었다.


202.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말이 있다. (중략) 그는 "준비하는 동안 매일매일 설레며 꿈꾸듯이 살아서 힘들기는커녕 오히려 행복했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여행할 때보다 준비할 때가 더 즐겁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심정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223. 내 남은 인생에서 오늘이 가장 꽃 시절이니까.


254. 되돌릴 수 없는 것은 빨리 잊기로 했다.


267. 예전에는 자고로 남자란 똑똑하고 능력 있어야 한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졌다. 남자란 모름지기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최선을 다하는 애처가가 최고라고 믿는다.


274. 아내에게 고맙고 안쓰럽고 미안하다. 지금은 오래오래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 달라고 자주 기도한다.


279. 많이 보고 느끼고 만족하는 사람이 여행 챔피언이다. 난 그가 부러웠다.


287. 여행을 다녀보니 후진국 기사들의 행태는 거의 똑같았다. 매번 요금 때문에 신경전을 벌여야 하니 초장부터 피곤해지고 짜증이 났다. (중략) 택시 기사나 툭툭 기사는 외국인 여행자가 낯선 나라에 도착해서 가장 처음 접하는 현지인이다. 일부 기사들 때문에 나라 전체의 이미지가 나빠진다.


302. 하지만 만약 한국에서 최고의 장비를 갖춰서 온 등반객이 모았다면 나라 망신시킨다고 손가락질할 것 같아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이국 땅에서도 한국인의 시선이 가장 신경이 쓰였다.


313. 김형석 교수의 말처럼 성장하는 동안 늙지 않는다. 늙지 않는 60대야 말로 진짜 인생의 황금기다.


345. 셋째,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쉽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은 내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347. I am a slow walker, but I never walk back. (중략) Never regret a day in your life: good days give happiness, bad days give experience, worst days give lessons, and best days give memories.



이전 04화 쫄보의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