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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 Jul 17. 2021

11년, 걸어서 지구 한 바퀴

L'homme qui marche

 이 책은 잇따른 사업과 사회생활의 어려움에 빠진 한 캐나다 남자의 11년에 걸친 '도보' 세계 여행기입니다. 탈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을 때 도피성으로 여행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요즘 많은 여행기를 읽다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숨 막히는 사회 속에서 용기 있게 탈출'을 선택했다고 아름답게 지난 기억과 선택을 포장하곤 하는데,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치열한 사회 속 깊숙이 비집고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도망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일부 여행기는 '도전'이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세계여행'이라는 것이 시간이나 경제적인 부분이 받쳐주지 않으면 쉽사리 시도하기 어려운 영역인 데다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의 '익숙함'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오지', '극한'이라는 것을 연상시켜주기 때문이죠. 모험을 한다는 여행가가 따뜻한 섬나라 휴양지를 가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무게감이 사뭇 다릅니다. 그간 읽어왔던 우리나라 아마추어 여행가들의 글과는 사실상 깊이가 많이 다른 책입니다. 원서의 제목은 L'homme qui marche, 영어로 굳이 번역해 보자면 The walking man, 즉 '걷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원서는 '걷다'는 행위에 집중한 꽤나 철학적이고 직관적인 제목이었는데, 아쉽게도 번역서의 제목인 '11년, 걸어서 지구 한 바퀴'라는 '여행'이 메인 콘셉트가 된 다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상업적인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많은 이에게 읽히게 하려는 노력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이 책은 캐나다를 출발하여, 북미, 남미 대륙을 거쳐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를 돌아 다시 북미 캐나다까지를 온전히 '걸어서' 여행한 11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총 걸은 거리가 7.5만여 km라고 합니다.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의 분량을 작가의 시간과 거리로 환산해 보면 한 페이지당 열흘이 넘는 시간을 담고 있고, 250km가 넘는 거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굳이 단행본 분량을 맞추기 위해 맥락에도 맞지 않는 글을 끼워 넣는다거나, 디자인 속지나 배경을 집어넣는 편집은 전혀 없습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손가락을 넘기는 행위와 작가가 수레를 밀면서 걸었던 한 걸음, 한 걸음이 묘하게 머릿속에서 겹칩니다. 이 분의 11년의 여행을 이렇게 쉽게 읽어버리는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몇 개월, 한 두 해의 여행을 미주알고주알, 적당한 자랑과 포장까지 섞어서 몇 권으로 풀어낸 책들이 머리에 스칩니다. 더 나은 책, 그렇지 못한 책이 있지는 않겠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책을 쓴 목적이 다를 테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11년 간의 이 여행이 진정한 '무전' 여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디 한 구석, '내 주머니가 비어있었지만 나는 이를 극복했다'는 의미 없는 과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몇 주 전에 읽었던 불편했던 여행기 아닌 여행기와는 아주 극명한 차이가 보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제공받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행이라는 말에는 '이동'이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 이동 자체를 돈 한 푼 지불하지 않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을 당연한 듯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두발로 세상에 곧게 서있는 당당함'으로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제목의 The walking man이 정말 어울리는 대목이지 않을까요.


 요즘 읽은 '혼자 떠난 여행'의 글을 읽다 보면 확실히 둘이 또는 여럿이 떠난 여행에 비해 장소에 대한 이야기보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사람이 많은 유명한 지역을 둘러보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일까요, 아니면 함께 이를 공유할 사람이 없었기에 그만큼 기억이 많이 남지 않는 것일까요. 대부분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 또는 그곳에서 만난 로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종류의 글을 읽을 때면 점점 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은 잘 안 맞겠구나.'


  11년간 걸어서 한 여행을 담고 있다 보니 이 책도 위험하고 불편한 지역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치안이 불안한 남미,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한 아프리카 등등. 이 책에 대한 내용은 아니지만 요즘 여행기를 몇 권 몰아서 읽다 보니 오지 여행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어릴 적 집을 나와 여기저기 유학생활에 직장생활에 떠돌다 보니 제 스스로를 city boy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아무 데나 흙바닥에서도 잘 자고, 어디서 무슨 음식이든 대부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느새 마흔 줄에 들어가다 보니, 가족을 꾸리고 살다 보니 '안전'과 결부된 문제에 대해서는 사뭇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여행이라는 것이 결국 '나'의 경험을 확장하고, '나'의 시야를 넓히고, '내' 내면을 돌아보는 기회인 것인데,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 듯 '어려운 곳', '오지', '사람들이 많이 가보지 않은 곳', '먼 곳', '위험한 곳'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요.


 굳이 없는 시간 쪼개서, 비싼 비용까지 지불해 가면서 그럴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듭니다. 사교적인 성격도 못 되는 탓에, 잘 모르는 사람들과 갑자기 어울려 지내는 것이 그리 편치도 않고, 원치도 않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굳이 말라리아모기에 대해 걱정해가면서, 며칠에 한번 샤워를 할까 말까 하면서 더 큰 비용과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인생의 다음 전환점에서 여행을 선택하게 된다면, 제가 바라던 장소에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제가 원하는 여유를 찾는 여행이 제게 더 맞지 않을까요.




14. 자유롭게 사는 것만이 삶이라는 이름에 걸맞다고. 자유가 삶보다 더 중요하다.


17. 스트레스를 풀려고 걷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느낌이 드니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마치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는 내 몸뿐인 것 같았다.


20.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단계가 남아 있었다. 뤼스와 식구들에게 내 결정을 알리는 일이었다.


32. 미국은 이런 곳이다.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함께 있는 나라. 심오한 가치들을 중심으로 국민들이 하나가 될 수도 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불평등을 묵인하는 모순의 땅.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에 마비된 채 스스로 쇠창살을 달고 감옥 같은 곳에 갇혀 지낸다.


40. "즐겨요, 삶을 즐기라고요!"


56. 나는 오히려 그가 부자라고 생각했다. 진정 소중한 가치가 뭔지 알고, 식구들 사이에 사랑이 넘치고 집은 아늑했으며 행복이 흠뻑 느껴졌기 때문이다.


69. 환각 효과는 별로 없었지만, 현실을 떠나 공상의 세계로 들어가서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서였다. 나는 정신이 완전히 맑은 게 더 좋았다. 그게 자유의 첫 번째 조건이다.


84. 파도, 별, 달... 너무 오해 혼자 지내다 보니 내가 친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101. 단 몇 분 동안이었지만 넬슨 만델라를 만났다는 것만으로 내 안전이 보장되었고, 아프리카 어디를 가더라도 특별한 후광이 있는 것처럼 대해주었다.


105. 모잠비크에서는 에이즈보다 말라리아로 죽는 사람들이 더 많고, 2000년에는 2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말라리아에 걸려서 아프리카에서 감염률이 제일 높았다. 모기에 물릴까 무서워 나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조심했다.


108. 이런 불행의 골짜기에서건 맨해튼의 거리에서건, 사람들은 똑같이 단순한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어디에서 살건 누구나 자신의 존재 안에 똑같은 행복을 담으며 살고 있다. 표현 방식은 달라도 감정은 세계 어디나 똑같다.


111. 우리 각자가 시간과 맺는 관계는 경제적, 문화적인 환경의 산물이며, 공통점이 없는 두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볼 수 있게 해 준다. 나무 밑에서 오랜 시간 명상을 하고, 가게 앞에서 기다리거나 손님들과 이야기를 하는 일들은 자본주의에 흠뻑 젖은 내 문화에서는 '쓸데없이 허비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귀중한 문화적, 사회적 기능이 있는 것 같다.


117. "절대 뛰지 마세요. 그냥 걷기만 하면 사자들이 쳐다봐도 안전해요. 겁에 질려서 난리 치지 않으면 사자들도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둘 거예요."


121. 하지만 원조에 의존하는 곳은 부패가 들끓고 천박하며, 구걸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129. 자존심 강한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동정을 혐오한다.


130. "하지만 너무 서둘러서 결정을 내리진 마. 당신은 돌아오면 지난 4년은 그냥 잃어버린 게 되니까. 당신 꿈은 끝날 거고,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거야."


134. 어쩌면 그런 것이 독재의 본질인 듯했다. 명백한 '이유' 없이 모든 일이 비현실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66. 모로코에선 왕가에 대한 의견 말고는 뭐든 말할 수 있다. 왕가는 신성한 영역이고 신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 안 된다.


173. 나는 시간, 돈, 최고로 좋은 것들을 좇아서 끊임없이 달리는 사람들이 불쌍했다.


182. 검은 빈곤과 하얀 부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선량한 사람들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진 것 같았다. 별안간 나는 탁자 위로 뛰어 올라가서 모든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왜 이른바 가난한 나라에서 자살률이 더 낮은 걸까? 세계 어느 곳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아이들의 웃음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던 건 왜일까?


187. 이곳에서 마을의 크기는 맥주 몇 갤런을 소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아일랜드의 펍은 삶의 방식을 넘어서서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190. 잉글랜드 사람들은 유령들도 마법과 수수께끼로 가득 찬 이 나라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소중히 아끼고 있었다. 나는 유령과 수수께끼, 마법을 믿는 잉글랜드 사람들이 좋다.


193. 독일에 오면서부터 나는 노숙자 쉼터 신세를 자주 지고 있었다. 이런 쉼터들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했고, 휴가 때 이용하는 가족 펜션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195. 독일은 강하면서도 세심하고, 엄하고 공정한 어머니 같았다.


200 "일을 잘하면 됐죠. 부끄러울 거 하나 없어요."


217. "우리는 세속주의를 지키기 위해 점점 더 치열하게 싸울 겁니다." 경사가 완만한 길을 걸으며 나는 세계의 길목에 살고 있는 민족들의 운명을 생각했다. 유럽을 갈망하지만 강력한 이웃 이란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는 터키 사람들, 나토와 미국의 힘을 빌려 거대한 러시아에 맞서 보려는 조지아 사람들. 이 지역의 역사는 이리저리 움직여 다니는 정체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22. 이곳 사람들은 술 때문에 힘든 삶을 술로 위로하려는 것 같았다.


235. 이란에서 마약 밀매상은 공식적으로는 교수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어디서나 온갖 종류의 마약을 구할 수 있었고 가격은 말도 안 되게 저렴했다. 이곳 사람들이 행동할 때마다 외치듯이 '위대한 알라' 덕분인 듯했다.


237. 휴대전화라는 작은 창이 난 감옥에 갇힌 죄수들처럼 살고 있었다. 그 창을 통해 그리 대단한 걸 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벽보단 나았다.


245. 나는 조금씩 환경에 적응했고 세균들과 같은 리듬으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248. 수천 년 동안 이어진 관습에 젖어 있는 사회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아니 50년이 지나도 어렵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종교는 폭력적이며, 그 폭력은 사적인 영역에서 가장 심하게 표출된다. 


249. 의무만으로 가득 찬 삶은 끔찍하다.


262. 아는 중국말을 다 동원해도 전혀 뜻이 통하지 않았고, 손짓 발짓을 해봐도 다른 문화권과는 다르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264. 샬린은 웃으면서 중국인들은 옛날부터 굶주림에 시달린 적이 많아서 조류의 머리와 발톱, 개, 쥐, 원숭이, 거북이 등 가리지 않고 뭐든 다 먹는 식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266. 중국 문화에서는 남들 앞에서 체면이 깎이는 행동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나는 중국 공산주의자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269.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초고층 빌딩들 수많은 행인들로 북적거리는 도심에서 나는 로봇들의 세계에서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누비아 사막 한복판에 있었을 때보다 더 진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코앞에 있는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봐야 할 것만 봤다. 마치 스스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270. 대부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이어폰으로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연료를 공급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75. 아무것도 없는 아프리카에서는 부족한 게 없었는데 일본에서는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부족한 것 같았다. 모잠비크에서는 매일 씻었던 기억이 났다. 그곳에서 나를 재워주었던 집주인들이 가장 먼저 신경 써주었던 것이 씻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사회의 열외자로 쌀쌀한 늦가을에 공원이나 숲에서 자다 보니 7~10일 만에 한 번씩 겨우 샤워를 했다.


276. 완벽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295. 브루나이 국민들은 자유를 전혀 누릴 수 없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축에 속하고 무상 의료 지원과 무상 교육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빈곤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국민 중 20%는 최저 생계비 이하 생활을 하고 있다.


301. 그러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하니 처음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먹기 위해 서로 다투는 세상에 있다가 너무 많이 먹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식탁에서 전자 기기를 가지고 노는 세상으로 옮겨간 것이다.


313. 사람들의 여행 방식에 대해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모험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지의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새로운 것을 찾는 모험은 미친 짓이다.


315. 차가운 물을 마시면 온도 차를 극복하려고 위장이 격렬하게 운동해서 소화에 문제가 생긴가.


319. 걷기는 자유롭게 즐기는 마지막 스포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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