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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 Jul 11. 2021

혼자 떠나도 괜찮을까?

기혼 여성 혼자 떠난 현실적인 세계여행

 여행의 콘셉트는 자극적입니다. 그렇지만 여행의 내용은 아주 현실적이었고, 책의 내용은 '여행 만'이 아니어서 더 좋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직장을 그만둔 아줌마가 남편을 한국에 혼자 두고 떠난 세계여행입니다. 아줌마라고 해도 대략 20대 후반, 30대 초반 정도이니 어쩌면 어지간한 아가씨들보다 어릴 수도 있겠죠. 어찌 되었건, 기혼여성이 가족을 두고 혼자 떠난 세계여행이라니, 그 시작이 자극적입니다. 요 몇 주간 읽었던 여행기는 여행을 좋아하는 신혼부부가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전세금을 빼서, 전재산을 털어서 탈출(또는 도피)하는 콘셉트의 여행이었습니다. 틀에 박힌 일상을 버틸 수가 없고,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고, 이런 내용이죠.



 복수의 인원이 다니는 여행과 혼자 다니는 여행의 차이점은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인원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나 혼자'일 때에는 현지에서 만난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대화'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모든 문제를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하죠. 누군가와 같이 다닌다면, 일거리는 줄어들겠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화와 소통'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나'를 돌아볼 시간은 그만큼 더 줄겠죠. 뭐, '우리'를 둘러볼 시간은 생기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은 혼자 다니는 여행이다 보니,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여행지는 이야기를 건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뿐, 바늘에 걸려오는 이야기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본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들, 여행지에서 문득 떠오른 예전에 미뤄두었던 생각들, 이런 것들 말이죠. 아니면, 혹시, 혼자 가다 보니 그냥 추억이 없어서 이런 이야기들로 책을 엮은 것일 수도 있지만요.


 그러다 보니 이 책에서는 여행에 대한 '느낌'만 있을 뿐, '정보'는 별로 없습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다른 신혼부부의 두꺼운 세계여행 책에서는 간이 가계부까지 정리해가면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고자 애쓰기도 했었는데, 이 책은 그런 목적과는 정 반대의 책입니다. 굳이 찾자면 정보는 작가가 사랑하는 '술'에 대한 몇 페이지 정도일까요. 이 책을 여행기나 여행서적으로 보기보다는 그냥 수필집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습니다.



 여행기를 보다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본인은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경험이다 보니 미화될 수밖에 없겠지만, 본인의 경험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와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신포도 방어기제로 도배되어 있는 글을 보고 있자면, 이 글을 몇 년 뒤에 다시 본인이 직접 읽으면 어떤 기분일지를 상상해보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현실적이어서 좋았습니다. 이런 식이 여행이라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보입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지 않을까요. 도전이나 모험에 도취된 나머지 불법이나 편법 또는 위험천만한 운 좋았던 경험을 글로 옮기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는 안전, 그리고 안전을 위해 홀로 세계를 여행했던 아줌마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서 좋았습니다. 이런 간접경험이 실제 누군가의 세계여행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꼭 위험해야만 대단한 모험일까요? 모두의 삶에 그런 모험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요? 아니면 더 높은, 더 대단한 여행이라는 게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다시는 이런 여행을 하지 않겠다는 더 솔직한 표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걸 이렇게 적을 수 있는 것이 더 용감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도피나 탈출이 아닌 여행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죠. 만약, 보통의 사회생활이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특별한 사람이라면, 아니면 이 여행을 통해 뭔가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 자극적이고, 그럴싸한 무언가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글 자체도 참 좋았습니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삶의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은 초년생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문장의 호흡이 참 좋습니다. 읽히는 글입니다. 여행은 여행대로, 책은 책대로, 맥락 없이 흘러가는 책도 적지 않은데, 이 책은 지금 주인공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수월하게 흘러갑니다. 물론 이래서 여행기라기보다는 그냥 수필집으로 분류하는 게 낫겠다는 것이지만요.


 작가를 설명해주는 표지 좌측 날개를 얼핏 들추어보니, 유명한 학교에서 글을 전공하고 비슷한 업무 경험도 쌓은 분이었습니다. 이래서 사람은 잘 배워야 되는구나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글을 배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배우는 것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글을 전공으로 배운다면 좀 더 나은 글을 써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책 전반의 구성과 분위기, 편집, 그리고 특히 삽화가 아주 잘 어울립니다. 표지를 다시 보니 삽화도 저자가 직접 작업한 것이더군요. 요즘 읽었던 몇 권의 여행기와는 다르게 중간중간 이상한 모눈종이나 편지지 같은 불필요한 배경도 없고, 저화질의 조그마한 추억사진을 억지로 끼워넣지도 않았습니다. 글이 있는 페이지는 텍스트만으로 깔끔했고, 삽화가 있는 페이지는 삽화만으로 정리되어있습니다. 이미지가 글을 읽는 흐름을 끊지도 않았습니다.


 텍스트만큼이나 직접 그렸다는 삽화에도 작가의 센스가 많이 묻어납니다. 보통 여행기에 삽화나 이미지 페이지가 들어가면 본문에서 적당한 문구를 발췌해서 이탤릭체 같은 폰트로 멋들어지게 같은 내용을 한번  적어주곤 하는데,  책은  삽화에 맞는 다른 문구가 적절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삽화 페이지도, 출판사 편집팀이 적당히 끼워준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책의 일부로 살아  쉬고 있습니다. 작가의 노력이 살아있다고 할까요. 물론 혼자 여행을  것이라 그럴싸한 절경의 여행지에서의 기념사진이 많지 않을 수도 있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책에 싣기가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둔기에 가까운 무거운 DSLR 들고 떠난 여행이라고 하는데  나온 사진이 없었을까요.


 저는 의도적으로 사진보다는 삽화로 정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명 관광지와 여행지의 사진은 구글 검색, 스트리트뷰만 보아도 넘쳐납니다.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보려고 책을 펼치는 것이 아니니까요. 작가는 그걸 알고 있었겠죠. 그런 면에서 이상한 사진과 편집으로 페이지수만 늘려 놓은 책들과는 수준이 다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디핑크 색상에, 북한 김정일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여자의 삽화가 그려져 있는 표지로 인해서 아마 저 같은 40대 아저씨들이 이 책을 서점에서 구매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을 것 같습니다. 내용은 참 좋았는데, 표지는 선뜻 들고 다니기 부담스러운. 그래서 예전에는 책을 다른 종이로 싸서 들고 다녔던 것일까요. 별 생각을 다 해봅니다.




7.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마. 삶에 대한 맷집은 사람마다 다른 거야."


8. 회사를 그만뒀다. 대신 서점으로 출퇴근했다. (중략) 그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했다. 다만 여행지에서의 안전이 문제였다.


40. 나중에 들은 것인데, 서울에 홀로 상경한 아빠는 자신의 몸도 스스로 챙겼어야 했다고. 본인이 술에 취하면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쳐야만 했을 테고 아빠는 그런 행동을 용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42. 회사를 그만두니 꼰대들이 주변에서 하나둘 늘어났다. 도움을 원하는 이에게 하는 조언은 그를 살리는 동아줄이 되겠지만, 도움을 원치 않는 이에게 하는 간섭은 그저 꼰대질에 지나지 않는다.


47. 꼰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이 당한 부당함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당연히 겪어봐야 하고 용인해야 하는 경험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55. 버스는 풍경과의 거리가 노골적으로 가깝고, 비행기는 지나치게 멀다. 기차는 풍경과의 거리가 적당하다. 어떠한 장면에서도 일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좋았다.


56.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은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에 좋았다. 그들을 다시 만나보았자 그날의 추억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이야기하다가, 다시 술집에서 만나 연예인의 연애나 이야기하는 시시한 인연으로 전락한다.


73. 아, 그때 '대충'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이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단어가 '대충'이라는 것을. 지극히 오래된 갈등, 시급히 개선되어야 하는 문제들도 이 단어와 섞이면 방부제 처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나는 우리 사회에 고쳐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을 동의하면서도, 정작 문제를 제기하는 자들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살았다. 아무 때나 '대충, 대충'을 말하는 우리는 비열했다. 기득권에 붙어 그들의 비위를 상하지 않기 위해서 원칙을 무시했다. 원칙주의자야말로 이 사회의 병폐를 공론화하는 용기 있는 자였다.


116. 이런 상황이니 다투는 방식에 대한 자부심이고 뭐고 남편에 대한 사랑이고 뭐고 반드시 이긴다, 네가 나한테 빌게 만든다는 마음만 가득 차 있었다.


121. 결국 내 특기인 '적극적으로 듣고 행동하지 않기'를 몇 번 보여주었더니 크게 상심한 듯했다. (중략) 도시는 전반적으로 쓸쓸한 분위기였는데 나는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활기찬 도시에서 더 외로워지니까.


135. "우리 타이타닉의 잭이랑 로즈 성격을 똑 닮은 것 같지 않아?" 남편에게 곧바로 답장이 왔다. "똑같지. 잭은 물속에서 죽어가는데, 자기는 널빤지 위에 올라가 있으면서 추워 죽겠다고 얘기하는 로즈랑..." 휴대전화를 껐다.


137.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들여 돌아다니지만, 매 순간이 여행의 첫날처럼 설레고 행복할 수는 없다.


142. 피곤하면 제아무리 절경이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이다. 무조건 반사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거리를 떠돌던 일을 잠시 중단하자.


204. "내가 줍지 않으면 이 도시는 더 더러워질 거야. 비록 한 순간이라도 나는 이 도로를 깨끗하게 만들고 있거든. 그 순간들이 쌓여 이 도시는 깨끗해질 것이라고 믿어."


221. 그러나 그 이후에도 서로의 고민을 건성으로 들으며, 휴대전화로 남자 친구와 만날 약속을 잡으며 "걱정 마, 너에겐 '진정한' 친구가 있으니까"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이들과 '진정한' 우정은 더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진정함'을 포기했다.


223. 친구의 조건은 까다롭다. 뭐든지 아는 사람은 재수 없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모르기만 하는 사람은 도무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주기만 하는 사람은 고맙지만 왠지 부담이 된다. 받기만 하는 사람은 그 뻔뻔함에 정이 뚝 떨어진다.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관계 가운데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사이. 그런 사이가 친구 같다.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져도 그 관계를 이어가기 힘들지 않던가.


229. 아르헨티나는 질 좋은 소고기로 유명하다. (중략) 일 킬로그램의 가격이 우리나라 한우의 백 그램 가격과 맞먹는다.


231. '고객은 왕'이라는 표어는 아무리 포장해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감정노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태어난 말 같다.


232. 타인의 무릎을 꿇게 만들어야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 이런 것들 때문에 서비스업 종사자가 감정노동자로 전락한다.


238. 여행지에서 책을 보는 일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장기 여행에서는 그 또한 사치였다. 생활에서 쌓이는 여독은 책의 무게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247. 이 험난한 세상에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자라서 이렇게 물어볼까 봐. "엄마, 왜 나를 낳았어?" 또 그 물음에 대답을 못할까 봐 겁이 난다.


256. 그렇게 도착해서 비몽사몽 새벽길을 걸어 민박집에 도착했을 때, 사장이 온갖 짜증을 내며 나왔다. (중략) 그리고 하는 말은 "방 없어요"였다. (중략) 가로등이 밝지 않아 두렵기도 했지만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인정머리 없이 대하는 사람들이 야속했다. (중략) 남편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며 근처 호텔을 예약해주고 민박집에 전화하여 '어른의 항의'로 사과를 받아냈다. 민박집 사장은 학생인 줄 알고 편하게 대했다고 변명을 했단다. 학생이면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건가...


269. 내 여행은 안전 제일주의였다. 그게 아내를 여행 보낸 남편이 가장 원하는 일이었고, 나도 결혼한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덜 수 있는 일이었다.


281. 아이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병아리 같은 것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하고, 별것도 아닌 것에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모습들은 정말 당연한 것처럼 귀엽다. 그러나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은 다른 분야이다.


286. 실제로 칠레에선 국내 커피 값 정도로 질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다.


300. "결혼을 한다고 네 꿈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니라니까. 나는 네 꿈을 위해 날개를 달아줄 거라니까."


302. 그러나 그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여행은 언제 그랬냐는 긋 나에게서 발자취를 감춰버렸다. 내 삶은 전혀 변한 게 없었다. 어찌나 그렇게 모든 것이 그대로인지 야속할 지경이었다.


304. 모든 이에게 여행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여행은 돈과 시간을 소비해야 가능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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