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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 Jul 10. 2021

한 달에 한 도시

Airbnb로 떠나는 세계여행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부부가 직장과 집을 정리하고 떠난 세계여행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잠시 멈춤, 세계여행'은 사실 제목만 '잠시 멈춤'이었고, 숨 가쁘게 달린 2년간의 마라톤이었는데, 이번에 읽은 '한 달에 한 도시'는 진짜 '멈춤'을 살펴볼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책도 빡빡하게 정리된 두꺼운 한 권이 아니라, 적당히 읽히는 두께의 세 권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서 보기에도, 읽기에도 그들의 여행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여행'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장기 여행자들이 '일단 떠나보고', 나중에 유명세를 바탕으로 책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부는 아예 여행 계획 당시부터 '여행으로 돈을 벌어보자'라고 마음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여행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글이 잘 정리가 되어있다는 것이 이야기입니다. 요즘 읽은 여행기 중 적지 않은 글이 맥락이 많이 끊어져서 재미가 반감되었는데, 이 책은 같이 여행을 하듯이 주욱 읽혔습니다. 


 여행 테마 자체를 에어비앤비로 떠나는 세계여행으로 걸었고, 실제로 에어비앤비 스폰서를 받기 위해 대놓고 노력(?) 했던 부분들도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에어비앤비의 장기투숙 할인 시스템과, 우리나가 여권이 가진 다수 국가와의 무비자 장점을 활용해서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 노매드로 살아보자고 아내와 자주 이야기했었는데, 이분들이 그걸 먼저 하셨더군요. 막연하게 '나중에 해봐야지'라고 생각했던 콘셉트를 이렇게 글로 만나니, 더욱 집중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여행책을 보면 막연하게 부럽기만 했었는데, 요즘은 세계여행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머릿속에 그려가는 재미도 솔솔 합니다. 이 책은 그런 부분을 충분히 채워줄 수 있었죠. 어제 읽었던 '무전여행'을 다룬 글은 보는 내내 불편하기만 했는데, 이 부부의 여행기는 정반대였습니다.



 한 도시에서 한 달씩 여행을 했기 때문일까요, 각 여행지에서 충분한 에피소드도 있었고, 문화도 있었고, 역사와 사회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여행기에서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숨 가쁜 일정 때문에 실제 그 사회를 보기가 어려웠었는데, 이 책에서는 여유롭게 다양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여행이 시간적으로 여유 있다 보니 글도 더 잘 정리된 것 같고요.


 물론 젊은 여행자들의 글을 엮은 책의 특징인 복잡한 편집과 과도한 사진이 독서를 조금 방해하긴 했지만 이 책은 문장과 문장, 챕터와 챕터가 분절되어 있지 않아 잘 읽혔습니다. 4~5백 페이지 책이 무려 세권이나 되었자만 줄어가는 페이지가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보통 여행기는 '소비적' 독서이기는 합니다. 머릿속에 무언가를 남기는 '투자적'인 독서라기보다는,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상황에서 남의 여행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나마 정리된 글이 맥락도 많이 깨지고 알맹이도 없다면 더욱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 책은 여행의 '현실적'인 부분을 많이 다루어서인지, 소비적이면서도 건질만한, 메모해둘 만한 '정보'가 많아서 더 좋았습니다.


 저에게 지금껏 다닌 여행 중에 기억에 남는 여행을 꼽으라면, 아마 서너 개의 후보 중에 분명히 카리브해의 크루즈 여행을 집어넣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대륙간의 이동을 이코노미 칸의 피로와, 착륙 후 시차 적응과 싸워야 하는 항공편이 아니라 크루즈를 통해서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편도 크루즈 여행은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말이죠. 유럽에서 미국의 항공편이 50만 원이고 2주간의 크루즈가 100만 원이라면 저는 무조건 후자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그 안에서 그간의 피로도 풀고, 정리하지 못했던 기억과 억지로 욱여넣어 다니던 짐가방도 정리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다는 점입니다. 에어비앤비는 현지인의 가정집에서 숙박을 하는 것이니 만큼 여행자들로 북적거리는 호스텔, 호텔과는 다른 에피소드가 생길 수밖에 없겠죠. 무조건 좋을 수만도 없었을 텐데, 그곳에서 벌어지는 좋았던 추억과, 나빴던 기억을 고르게 잘 정리해주어서 간접경험으로 더할 나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에어비앤비 장기 숙박을 하게 된다면 어떤 부분을 더 신경 써야 할지도 생각해보게 되었고요.


 책 중간에 '겸손한 여행'이라는 표현이 종종 나오는데, 다른 젊은 여행자들의 허세 Bragging가 없어서 좋았습니다. 본인들의 경험을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하거나 미화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트래킹 투어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라고 이야기 하기보다 '왜 여기서 이렇게 걷고 있나'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은퇴 후 아내와 여행을 간다면, 몇 박 며칠 침낭과 텐트를 메고 다니는 트래킹을 하는 것이 맞는지 가끔 생각해 보고는 합니다. 저 자체가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하기도 하고, 아내가 많이 왜소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나중에, 언젠가, 그때가 온다면 이 책의 이 부분을 떠올리며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까 합니다.


 몇몇 젊은 여행자들의 글에서 불법과 위법에 대해서도 Bragging 하곤 하는데, 이 책에서는 이런 부분도 겸손하게 반성하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글이라는 것이, 말이라는 것이, 언어라는 것이, 나를 떠나고 나면 어디서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데, 무책임하게 불법적인 것을 으스대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여행으로 돈을 번 '프로'에게는 맞지 않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프로 스포츠 선수가 불법 약물을 투여하는 것과 같이 말이죠. 자극적인 게 좋긴 하지만, 그게 독자로 하여금 어떤 영향을 미치게 할지도 생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많은 도시의 '도서관'을 살펴볼 수 있는 것도 책을 읽는 내내 소소한 재미거리였습니다. 저도 책과 그 분위기를 좋아하다 보니 시내 관광 기회가 있으면 도서관, 서점을 빼놓지 않고 들리기는 합니다. 하지만 온갖 눈치를 이겨내서 잡은 짧디 짧은 휴가 기간에, 빡빡하게 짜 놓은 일정 가운데 도서관에 앉아있기는 쉽지 않죠. 이 부부와 같이 한 달 정도씩 그 동네에서 살면서 하루에 몇 시간, 일주일에 며칠 도서관에 들려 책도 보고 글도 쓰고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1권


23. 관광지에서 많은 사진을 남기는 것과 여권에 찍힌 도장의 숫자로 정리할 수 있는 여행은 우리가 원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쫓기기 싫어 떠나는 여행이다.


75. 겸손한 여행을 하자고 다짐했었는데.


79. 자장면을 먹을 것인지 짬뽕을 먹을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 하나씩 시켜서 나눠 먹는 것이 부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106. 이후 우리는 이스탄불 숙소 예약을 취소해야 했던 과정에서 '분쟁해결 도구'를 사용해 봤다.


242. 한국에선 주중에는 야근과 회식, 주말에는 각종 경조사를 챙기느라 바쁘게 살며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틈이 생기면 이런 생각을 했다. '외국의 어느 조용한 섬이나 마을에 가서 한 달 정도 쉬고 싶다. (중략)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상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곳은 어디 없나?'


274. 약속은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약속이라는 단어가 주는 책임감 때문에 나는 꽤나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타인이 약속을 어기는 것에도 관대하지 못했고 내가 약속을 못 지켜도 굉장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328.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그런 사람들이 사는 집이기 때문에 호텔에서 묵는 마음가짐으로 찾는다면 실망하게 된다. 게다가 돈을 지불했으니 뭘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에어비앤비 사용자로는 적합하지 않다. 내 친구의 집에 놀러 온 것처럼 지내야 하고 내 친구가 앞으로 계속 살아야 하는 집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372. 은덕의 말대로 모든 사람이 내게 친절해야 할 필요는 없다.


373. "잃어버린 오이스터 카드 가격 4만 원. 그 돈이 과연 하루를 버릴 만큼 큰돈이었을까?"


374.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사람 좋아 보인다는 말을 듣고 살았고 그 말이 좋아 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착한 얼굴로 한평생 살았다. 나는 정말 그런 내가 좋았다. 하지만 긴 여행을 시작하고 나니 나의 진짜 얼굴을 바라볼 시간이 많아졌다.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오롯이 나만 바라보는 시간, 나를 위한 선택을 하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나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나는 착한 사람도 아니었고 늘 친절한 사람도 아니었다.


399. 런던의 도서관은 공원만큼 문턱이 낮다. (중략) 런던의 도서관에서는 누구나 간섭을 받지 않고 온전히 섬처럼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무관심이야말로 도서관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배려가 아닐까? 조용히 책을 읽는 나만의 시간을 바라는 사람에게 런던의 도서관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449. 몇 달씩 이어지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중략) 우리는 돌도 씹어 먹을 수 있는 20대와 작별한 지 오래니까.


479. 우리가 리버티호에서 보내는 시간은 14박 15일이다. 1년 전쯤 예약했고 1인당 가격은 100만 원.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값보다 정확히 2배가 비쌌다.



2권


5. 수없이 망설였지만 누군가에게 증명하듯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여행을 하기 위해서 조금은 고집스럽게 살았다.


41. 크루즈를 싸게 타는 법. 1 - 리포지셔닝을 노려라. 우리가 1인당 100만 원으로 보름 동안 크루즈를 탈 수 있었던 이유는 리포지셔닝 Repositioning을 하는 배였기 때문이다. 전 세계 90%의 크루즈는 봄/여름 시즌에는 지중해와 북유럽을 돌고 가을/겨울 시즌에는 카리브 해나 남극 항로에 오른다. 대륙을 옮기는 리포지셔닝 시기에는 어차피 되돌아가는 배이니 저렴하게 비용을 책정해서 최대한 많은 인원을 태우기 때문에 비교적 값이 싼 편이다. 2 - 창문을 포기하고 1년 먼저 예약하라. 크루즈는 호텔처럼 객실의 등급에 따라 비용이 천차만별인데 우리는 내측 선실, 즉 창이 없는 방 중에서도 가장 싼 방을 골랐다. 발코니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방과 가격이 2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가판에 오르면 보이는 것이 온통 바다이니 방에서 보는 전망을 포기한다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예약한 시점에 따라서도 가격 차이가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출항 1년 전에 예약하면 싸고 좋은 방을 구할 수 있지만 출발 직전에도 잔여 객실 중 이와 비슷한 비용으로 구할 수 있으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자.


64. 불법인 것도,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인 줄도 알고 있었지만 가난한 여행자인 우리에게 돈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지금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지만 그때는 '다른 여행자들도 그렇게 한다더라'라는 말에 홀딱 넘어갔다. 부끄러운 일이고 반성도 했지만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혹시나 다른 여행자들도 같은 실수를 할지 모르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돈을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쓰는 것은 분명 잘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불법행위는 오히려 여행의 추억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길 수 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여행을 되새김질하기 위해서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다.


69. 다른 여행자도 위조 학생증, 위조 신분증 들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할인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돌아서 우리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야.


79. 일분일초가 아쉬운 여행이었다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려웠겠지만 원래 그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마냥 느긋하게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며칠쯤은 도서관에 앉아만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89. 딴생각을 하느라 끝났는지도 몰랐고 남들이 일어나면 눈치껏 같이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그렇지만 공연을 보고 난 뒤 허세 가득한 자랑을 SNS에 올렸다. 공연 자체의 기쁨보다는 희소가치가 있는 공연을 내가 봤다는 만족감에 나는 더 취해 있었다.


95. 평일에 시간이 난다면 무조건 공연장으로 간다. 이때 '티켓이 없으면 말고'라는 마인드 컨트롤은 필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마음을 비우고 기다려야 한다.


98. 서울의 삶이 숨 막힐 정도로 빠르게 돌아간다고 느꼈는데 뉴욕은 그 2배쯤 되는 것 같아. 숨이 턱 밑까지 찬다는 표현이 딱 맞아. 여기 사는 사람들이 헐떡거리니까 여행하는 사람도 덩달아 삶의 박자가 빨라지는 거 같아.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주인공이 왜 그렇게 말이 많고 빨랐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118. 예수님 탄생을 기리며 축하하는 날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127. 여행은커녕 숨 돌릴 틈도 없이 종일 글을 쓰고 있자니 후회가 밀려왔다.


130.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쓰는 게 목표였으니 우리 글에는 허세가 없었으면 좋겠어. 어디를 다녔고 무얼 먹었는지에 대한 자랑 섞인 허세 말고 우리에게 일어났던 소소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담겼으면 좋겠어.


179. 그분이 불편했던 이유는 우리를 만나자마자 호구조사를 했기 때문이야. 이름, 나이, 직업, 사는 곳, 출신 학교, 부모님 고향 까지. 이런 개인적인 질문을 처음 본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던지는 사람이 또 있을까? (중략) 어르신이기에 묻는 말에 답을 하기는 했지만 영 내키지 않았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알겠는데 입도 뻥긋 못하게 원천 봉쇄하니까 답답하기도 했고.


181. 십수 년 전, 넓은 세상을 찾아서 미국에 이민을 갔고 다시 이곳까지 왔다는 분이 우리에게서 혈연과 학연의 고리를 찾으려는 것이 안타까웠어. 생전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술 한잔 하자고 했을 땐 이역만리 타지에서의 삶이 그만큼 외롭다는 것이었을 텐데.


196. "살면서 어떤 그릇이 될까를 고민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보다 어떤 것을 담고 싶은지 아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253. "여행에서 얻고 싶은 게 딱 한 가지가 있어요. 한국에서는 싫은 걸 싫다고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어요. 이걸 깨고 싶어요."


262. 한때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이었던 콜론 극장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었던 이유도 예술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의 태도가 뒷받침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콜론 극장에서는 발레 공연을 5페소(한화 500원)에 볼 수도 있었다.


312. 신혼 때 매일 야근하고 회식하는 남편 때문에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지인은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전 부러움 섞인 말을 건넸다.


318. 나는 겉으로 착해 보이나 사실은 남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 본래의 내가 아닌 모습을 만들곤 했다.


473. "그런데 우리는 싸서 좋지만 여행객이 현지에서 투어, 숙박, 쇼핑 등을 할 때 기를 쓰고 깎는 것이 바람직할까?"


482. "은덕아, 하기 싫으면 확실히 안 하겠다고 사람들에게 말해. 그게 아니라면 재미있게 열심히 찍고."


490. 세상에는 낯선 음식이 있을 뿐이지 맛없는 음식이란 없다.


549. 처음 도착하는 순간, 이곳과 사랑에 빠질 것 같다고 말했던 도시가 있었다. 런던, 도쿄 그리고 홍콩이 그랬다. 어찌 그리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이방인이 보기에도 안전하고 질서 정연한 모습 때문이었다.



3권


32. 여행 내내 아버지는 무던히 참으셨다. 당신은 어떤지 몰라도 은덕과 내가 본모습은 그러했다. 엄마는 끊임없이 아버지의 행동을 빈정거리거나 비난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엄마야말로 억지를 부리고 있었지만 엄마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저 듣고만 계셨다. 그 모습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는 수준을 넘어 마치 달관의 경지에 이른 성인 같았다.


48. 큰돈 들여서 세상 유람을 나왔는데 돈이 없다고 맛집도 안 가고 명소도 지나치고 공연과 전시도 안 보는 것만큼 미련한 일이 있을까?


76. 한국에서도 외국인을 대상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택시 기사가 있다는 뉴스를 봤는데 제발 그러지들 마시라. 한 번 당하면 다시는 그 나라에 가고 싶지 않으니까.


103. 여행하면서 다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상대방의 속도에 맞추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합의점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숱하게 싸우면서 서로의 존재에도 익숙해졌다. 흔히 부부생활을 나란히 걷는 것에 비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란히 걷기보다는 서로의 뒤통수를 보며 걷기로 했다. 내 뒤에서 누군가가 발맞춰 걷고 있음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111.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이 트래킹이 하고 싶지 않다. (중략) 물론 그 과정에서 만난 풍경은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고생스러운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123. 은덕은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고 외치지만 누군가는 조금씩 포기해야 한다.


139.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다른 사람을 탓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 아플 때마다 돌봄을 강요하는 듯한 태도도 지긋지긋했다.


145. 트래킹이 끝나고 카트만두로 돌아왔을 때 도시의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중략) 트래킹을 마치고 돌아오니 똑같은 도시였지만 도시를 바라보는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도시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


244. 우리는 방콕에 있었지만 방콕에 있는 게 아니었다. 오직 호텔에서만 뒹굴거렸기 때문이다. 방콕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인에게도 호텔 체크아웃 날짜에 맞춰 방콕에 도착한다고 알릴 참이었다.


322.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두려운 것이 타인과의 관계 맺음이었다. 외떨어진 섬처럼 살아가던 우리였는데 이제 얼마 뒤면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놓이고 섬 안으로 사람들이 몰아닥칠 것이다. 상상만 해도 혼란스럽고 피곤하다.


329. 우리보다 앞서 세계여행을 하고 다시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궁금했다.


333. "서울에서 내는 한 달 월세면 어느 도시에서도 먹고살겠네?"


340. 여행 중 부모님 집에 맡겼던 짐을 이사하기 전 정리했는데 그중 절반 가까이가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우리가 짊어지고 살았던 것 대부분은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한 쌓아두고만 있던 미련함의 산물이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서울살이를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중략) 불편한 삶이기는 했지만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했던 방식이다. 불편한 것이지 부족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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