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처음부터 스터딩맘은 아니었다. 10대 때부터 품고 있었던 소망이 있다면 바로 '미국유학'이었다. 책이나 드라마에서 외국인들과 영어로 토론하는 모습이 그리도 있어보일 수가 없었다. 단지 언어가 영어일 뿐인데 그 모습이 그렇게 폼이 나보이다니 역시 난 문화사대주의인가? 대학 때 영어학을 복수전공이라도하며 대리만족 했다.
평생 유학은 못 해볼 줄 알았는데 마음에 품고 살다보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 28살 조금은 늦은 나이에 석사 학위를 따러 미국으로 가게 된 것. 미국에서 강사로 학부 아이들을 가르쳐 받은 장학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2년간의 석사 과정을 무사히 끝냈다.
타지에서 고생한 만큼, 금의환향을 꿈꾸며 한국으로 돌아왔건만. 무슨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소개팅을 했는데(엥?) 남자친구가 생겼다. 낮에는 가끔 강사일을 했고, 남친 저녁 퇴근후 매일 맛집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반 년이 흘렀다. 노는 것도 싫증나기 시작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배운게 공부니 박사까지 해볼까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원서를 넣었다. 그 가벼운 시작 뒤엔 무거운 사슬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줄은 모른채. 아무튼 그렇게 같이 놀았던 남친과 박사과정 중 결혼을 했고, 감사하게도 아기가 빨리 찾아와주었다. 그렇게 나는 스터딩맘이 되었다.
대학원 사람들에게 임신이란 사실을 빨리 말하고 싶지 않았다. 티 안내고 하던 일을 계속 하다가 배가 불러질 때쯤 짜잔!하고 알리고 싶었다. 별 뜻은 없었다. 굳이 일상에서 배려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고작 임신 6주 차에 상위 1%의 지옥입덧이 시작되었다. 나는 하필 입덧 중 최악인 '토덧'에 당첨되었다. 뽑기 운이 이렇게도 없을 수가. 물만 마셔도 토하는 걸 하루에 열 번 정도 하다보니 2주 만에 몸무게가 40kg까지 내려갔다. 조금 더 빠지면 갈비뼈로 기타도 칠 수 있다. 고개를 들 힘도 목구멍 밖으로 소리를 던질 힘도 없었다.
상태가 이 지경이라 학교에 매일 나오기가 힘들었다. 임신 9주차에 들어서자 지도교수님께 알릴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께 임신 소식을 전하기가 왜인지 모르게 죄송스러웠다. 이미 나는 이 연구실에서 뒷방으로 밀려난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모두가 바쁜 상황에 열심히 하던 인력 하나가 쓸모없어졌으니 이걸 어찌 알려야 할까.
그때 너무나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주시던 교수님의 얼굴이 아직 생생하다. 그 축하는 '찐'이었다. 교수님 주변으로 밝은 빛이 설렁이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기쁜 일이 맞구나. 큰 위안이 되었다.
스터딩맘이 되었다
스터딩맘이 된 것은 오로지 나의 선택이다. 가계에 당장 도움이 되지도 않고, 아이에게도 100% 집중할 수 없다. 누가 제발 공부 좀 하라고 등 떠밀지도 않았다. 오직 나의 선택이기에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헤쳐나가는 것도 나의 책임이다. 나 힘들다고 징징댈 수도 없는 입장, 그것이 스터딩맘이다.
대학원생에서 엄마로 나의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었다. 엄마가 된 것은 잘 항해하던 배가 갑자기 뒤집히는반전과 같은 것이었다. 학생일 땐 1학기가 끝나면, 2학기가 오고 그러다 수료를 하는 등의 대략의 계획표가 눈 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육아에는 접목되지 않았다. 블로그, 카페, 육아서의 다양한 가이드라인을 참조하기에도 워낙 애 by 애라 뭐가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아기의 발달사항에 맞춰 준비하는 것도 어찌나 많은지. 아기가 잠든 밤이면 장난감, 책, 오감놀이, 이유식 만들기 등을 무한히 검색했다. 아기가 돌이 되기 전까지는 혹시나 나의 게으름이 아기의 발달을 1이라도 지연시킬까하는 걱정을 꽤 했던 것 같다.
나는 이렇게 갑자기 이상한 나라에 떨어져버렸다. 학교에 9am to 9pm으로 매일같이 다니던 나의 과거가 너무나 생소하고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냥 학업은 이제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박사 받는다고 취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이 버라이어티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력서 한 줄이 늘어나는 거뿐인데.' 여우의 신포도가 내 속에서 울렁거렸다.
그런데 날 잡아둔 것은 오히려 날 잡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공부를 포기한들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학교 안에도 가족 안에도. 그렇다 보니 나의 의지만이 날 붙잡을 수 있었다. 포기한다면, 그것은 아이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서 나도 다시 풀타임 대학원생으로 매일 학교에 나오게 되었다. 다시 이 속으로 들어와 보니 피부로 느껴진다. 나는 멈춰있었을 뿐인데, 다들 달려나가다 보니 100km는 뒤쳐졌다는 걸.
하지만 왜인지 마음이 편하다. 누군가 나에게 기대하는 점이 없어서 그런 거 같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들이 먼저 학위를 받고 떠나고 있지만,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이 또한 득이다. 외적인 속도는 느리지만, 아이가 없다면 죽었다 깨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배웠다. 나는 여전히 주양육자로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머나먼 박사학위를 향해 헤엄치고 있다. 내가 원하는 일을 둘 다 할 수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진실로 생각한다. 감사하다는 마음 한 스푼이면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