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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초이 Dec 13. 2020

출산 직전, 논문 세미나 발표

죄송한데 저 잠깐만 쉬었다 할게요


발표를 하던 중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온 세상이 핑핑 돌며 눈 앞이 까매졌다. 교탁을 겨우 붙잡고 고개를 숙여버린 찰나 '어머, 어떡해' 웅성웅성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누군가는 나에게 앉으라며 다급히 의자를 가져왔고, 누군가는 재빨리 물을 떠 왔다. 나중에 들은 연구실쌤 말로는 몇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세미나 사건이었다고 한다. 


우리 학과의 경우, 박사 코스웍 3학기엔 논문세미나 발표를 한다. 연구결과까지 포함한 하나의 완전한 소논문을 내기에 대개 여기서 발표한 논문으로 저널에 투고한다. 논문을 강제로 써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코멘트를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다만 문제는 이 자리가 참으로 부담스럽다는 거다.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전해 수백 명의 판정단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과 같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질문과 코멘트를 듣고 디펜스를 할 수 있거나 못 하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포기한 듯 속으로 외친다. '자 여기 판이 깔렸어요. 저를 마음껏 까주세요.'


스무살에 대학 방송국에서 겪었던 세미나도 그랬다. 1학년 수습국원이 정식으로 YB가 되기 위해선 세미나에 본인의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된통 까여야 한다. 대학방송국 아나운서였던 나는 PD인 다른 친구와 두어 달 동안 짧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 친구와 책상 앞에 앉아서 까임을 당할 준비를 시작한다. 내 앞엔 수십 명의 YB, OB 선배들이 독수리 같은 눈으로 프로그램을 관찰한다. 진행자인 내가 들은 코멘트는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사투리 억양이 있어요, ㄱ,ㄹ,ㅇ 받침 발음이 부정확해요, 인사하며 손 흔드는 게 어색해요, 옷이 좀 부 해 보이네요."


그런 것들을 받아적고 있노라면 내 자신이 하염없이 작아져 없어져버릴 것만 같다.


사실 이런 자리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평가 받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렵다. 그러나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 싶다면 피할 수 없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평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이다. 김태희의 연기력은 평가의 대상이 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지만, 1초 말하고 사라진 무명 배우는 그것에서 자유롭다. 그러니 무뎌지려고 애써 노력할 수밖에.



조금이라도 덜 까이고 싶어 급격히 배가 불러오는 와중에 논문 세미나는 열심히 준비했더랬다. 해외 논문을 대상으로 메타분석을 하는 바람에 논문을 천편 넘게 뒤졌다. 굳이 영어로 써보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시간도 배로 걸렸다. 


과정은 심히 노가다였건만, 연구결과는 매우 심플하고 시사점을 줄만한 것도 없었다. 내가 봐도 'so what'인데, 누가 본들 다르리. 스카이캐슬 마지막회 같은 논문만 덩그러니 남았다.  글의 결론은 제일 마지막으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시작 전에 먼저 생각했었어야 했다.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나의 컨디션이었다. 임신초기부터 입덧으로 고생하던 나는 임신 후기에 극심한 빈혈까지 겹쳐버렸다(결국 출산하자마자 내 인생 첫 수혈을 받았다). 배가 급격히 불러오면 건강한 임산부도 숨이 빨리 찬다. 나는 일상적으로 숨이 찬 상태라 조금만 무리해도 산소가 부족해졌다. 그토록 말하길 좋아하는 내가 복도에서 잠시 수다 떨다가 어지러워서 자리를 떠야 했으니. 이 몸 상태로 1시간 동안 사람들 앞에 서서 발표를 한다는 게 무리로 느껴졌다. 일단 떨면 안 된다. 말이 빨라져서 더 숨이차니까. 발표 한참 전에 텅 빈 강의실에 서서 분위기에 익숙해지고자 했다. 입꼬리를 위로 당기며 기분 좋은 상상도 가득했다. 누가봐도 내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데까지는 성공한 듯하다.  


열심히 한 컨디션 조절은 발표한 지 10분도 안 되어 동이 나버렸다. 나의 결과물이 자신이 없었던 탓일까. 발표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긴장해버렸다. 말이 당연히 빨라졌고, 숨이 찼고, 거기에 맞춰 말이 더 빨라졌고, 숨 쉴 텀이 없어졌다. 갑자기 3차원의 공간이 내 머리 위로 쿵 내려앉았다. 눈 앞이 까매졌다.  


내가 힘들어 보였던 덕분이었을까. 디펜스를 못 할 만큼 당황스러운 코멘트는 받지 않았고, 오히려 힘든 와중에 고생했다며 응원도 받았다.  마침 이 시기에 임신 후기라니, 참으로 시기도 잘 만났다. 이 세미나를 끝으로 한 동안은 평가받을 일이 없으니 체증이 내려앉는 느낌이다. 나를 괴롭혔던 빈혈도 열 달을 괴롭힌 입덧도 출산과 동시에 사라졌다. 과정은 길어도 결과는 순간이다. 나의 논문이, 출산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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