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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초이 Dec 24. 2020

대학원생의 출산후유증


녹음이 짙게 자리한 7월, 그토록 기다리던 나의 아기를 만났다. 여리고 여린 아기의 모습에 불쑥 튀어나온 모성애로 두 달을 보냈다. 그리고 9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마침 꼭 들어야 할 수업이 이번 학기에 열린 바람에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학교에 가기로 결정한다. 주 1회 3시간이면 되는데 뭐 별거 있겠어?


그런데, 첫날부터 깨달았다. 예상보다 별거라는 걸. 두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가 어찌 엄마를 아는지 내가 곁에 없으면 울어댔다. 학교에서 스피커폰을 통해 목소리를 들려주면 울음을 그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출산 후유증이 학교에서 더욱 존재감을 알렸다. 그 기간 경험한 나의 출산후유증은 다음과 같다. 



후유증 1: 기억상실증 


선배 스터딩맘들이 미리 말해줬다. 출산하면 뇌가 잘 안 돌아간다고. 두 달간은 모성애에 취해 몰랐는데, 등교 첫 날 내가 기억상실증인 것을 깨달았다. 주차권 등록을 하러 갔는데 학과 이름, 학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기억이 안 나지? 수업 중에는 '독립변수'란 단어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독립변수, 종속변수는 대학원생이라면 잊을 수가 없을 만큼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데.


"independent variable이 한국어로 뭐였지?"

"독립변수. 언니, 그걸 영어로는 기억하는 게 더 신기하다."


나도 영어단어만 기억한게 신기하다. 미국유학 시절의 뇌로 돌아간 것인가. 영화에서 봤던 특정 시점 이후로만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스쳐지나간다.



후유증 2: 관절 통증


임신 중기부터 몸은 분만 준비를 하느라 릴렉신 호르몬을 뿜어대고 온 몸의 뼈마디가 벌어진다. 출산 6개월 후까지도 이 호르몬이 분비된다 하니 엄마의 뼈는 너무나 괴롭다. 임신 후기부터는 손가락뼈가 이상해져 손을 웅켜쥐기도 힘들었다. 수업 첫 날, 필기를 하려고 펜을 잡는데 동물 손이 된 것 마냥 너무 불편한 것이다. 글씨를 처음 배운 사람마냥 삐뚤삐뚤하게 썼다.

 

더 큰 문제는 고관절이었다. 3시간동안 의자에 앉아있는데, 왼쪽 꼬리뼈 부분이 너무 아파 눈물이 맺혔다. 앉아만 있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 자세가 하중이 많이 실린다는 사실을 나중에 도수치료를 받으면서 알았다.


수업 중 처음 느꼈던 고관절 통증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애를 안고나면 느껴진다(내가 13kg를 이리 번쩍 들게 될 줄이야). 그래서 후배맘에게 꼭 말한다. 산후조리는 진짜 제대로 하라고. 1시간이라 한들 방심하지 말라고.그래도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지 않은가. 학교에 나간 덕분에 회복된 출산 후유증도 있다.



후유증 3: 산후우울증


천국이라고 불리는 조리원에 있을 때, 나는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새벽 5시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식사하라며 깨우시는 소리에 좀비처럼 일어나 미역국밥 겨우 먹고 들어와 설잠에 들었다.


산후우울증을 작동시킨 트리거 중 하나는 안타깝게도 시어머니셨다. 어머니가 일주일에 두어번씩 육아를 도와주러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당시 친정엄마가 암투병 중이셨는데 임신한 나에게 숨기셨기에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 친정엄마가 아프시니 본인이 도와주시겠다는 선한 의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와 성향이 다른 부분이 있기에 집안일이나 육아로 부딪히진 않을지 걱정이 10절까지 이어졌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결혼 전후에 서운했던 일들이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을 마주칠 때마다 눈물이 났다. 나는 아기만 보면 너무 행복했는데 꼭 깊은 밤만 되면 그것들이 올라왔다.


새벽에 울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다 같이 대화를 해야한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께 앞으로 마음에 둔 일이 있으면 삼키지 않고 말씀드리겠다고 선언(?)했다. 어머니께서는 당황스러움과 서운함을 애써 감추시며, 본인을 더 편하게 생각해 달라고 하셨다. 당시 산후우울증의 화살을 직격타로 맞은 어머니를 떠올리면 지금도 죄송한 마음 뿐이다.  


나의 산후우울증은 학교가 단번에 해결해주었다. 엄마로서만 집중된 나의 의무가 갑자기 외부환경으로 와해된 것이었다. 원래 알던 편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바쁘게 발표 준비를 하고, 시험도 쳤다. 육아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가 생후 6개월까지라던데, 그 와중에 나의 인생을 잠시 살다 컴백할 수 있으니 콧바람과 같은 시절이었다.  


출산후유증을 뭉탱이로 겪다보니 10년 전의 캄보디아 여행이 생각났다. 씨엠립에 있는 왓트마이 사원에 갔는데, 그 곳엔 킬링필드 희생자들의 유골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해골산을 가르키던 여행가이드의 설명이 생생하다.  


저 해골들 중에 빨간 해골은 출산으로 몸의 철이 다 빠져나간 엄마의 것입니다.

이게 의학적으로 검증된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뚜렷히 느껴지는 빨간 해골에서 엄마의 희생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임신 때부터 벌어진 뼈로 힘들게하더니 죽어서도 엄마의 뼈는 아픈가 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빚을 지고 태어나는구나.


엄마의 희생을 잊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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