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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Mar 14. 2017

취미는 여행

이상향


이처럼 여행을 하다 보면 모든 일이 예정대로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국땅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장소 - 그것이 바로 타향이다. 그러기에 모든 일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하면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 이상한 것, 기막힌 일들과 조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 <우천염천> 하루키


고등학생때의 내가 스트레스를 풀던 방법이 하나 있었다. 스무살이 되면,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수첩에 적고 틈만 나면 들춰보는 것이었다. 그 목록중에 1번은 여행이었다. 도서관에 가면 하늘에서 찍은 세계 사진 따위의 책을 가장먼저 보곤 했다. 난 늘 떠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시간은 따박따박 흘러 스무살이 됐고, 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은 상상이상이었다. 난 늘 책임감에 허덕이는 아이였다. 전형적인 모범생 증후군. 그런데 여행지에선 아무런 책임감도 없었다. 먹고 즐기는 일 뿐. 어마어마하게 멋진 경험이었다. 떠나야만 보이는게 있다는 말을 정말로 이해하게 됐다.


 Lake Bled의 백조. 투명한 물이 정말 예쁘다


내가 꿈꾸던 장소와 닮았있던 Lake Bled

솔직히 멋모르고 떠난 첫 유럽여행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에도 그때 갔던 블레드 호수는 계속해서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블레드 호수는 내가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인 장소와 닮았다. 평화롭고 여유롭고 빛이 아주 예뻤다. 맑고 투명한 호수물은 바닥까지 다 보였고 하얀색 백조는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꽤 가까이 와서 먹이를 받아 먹었다. 겨우 스무살 주제에 어째서 여유로움에 매료되었던 건지 지금 생각하면 조금 짠하다.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모범생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나를 압박하고 있었고 난 필사적으로 여유로움을 찾았다. 따뜻하고 좋은빛, 투명하고 푸른 물에 캐논볼 다이빙 해대는 유럽꼬마들이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호수 주위를 걷다가 블레드의 사계절을 찍어놓은 안내 표지판을 봤다. 공무원들 센스는 여기나 거기나 비슷비슷 한것 같다. 촌스러운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겨울 블레드는 또다른 의미로 아름다웠다. 꼭 다시 와야겠다 생각했다.




몇년이 지나고 동생과 사촌동생을 꼬셔 한겨울 블레드로 떠났다. 새하얀 세상 그  한가운데 있는 고요하고 여유로운 그 장소를 꼭 보고 싶었다. 눈이 소리를 흡수한 고요한 세상,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소나무, 그 위에 하얗게 쌓여있는 눈. 꽁꽁언 호수 위를 걸어 가운데 섬까지 걸어가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완벽하지 않은 이야기, 여행이 훨씬 더 많다. 아쉽게도 나의 이상향 찾기 여행이 그랬다. 한겨울 이었지만 눈은 없었다. 호수도 얼지 않았다. 푸른 잔디들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변하지 않은건 나의 주머니 사정뿐. 여전히 배를 타고 한가운데 떠있는 섬에 가기엔 내가 너무 가난했다.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꿈꿔온 일은 이뤄지지 않아도 이미 내가 겪은것 처럼 느껴진다. 나혼자 상상하기를 반복했던 블레드가 전혀 다른 현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래도 머릿속에선 환상으로 남아있다. 현실의 겨울 블레드 호수를 보고 나서도 별거 아닌 그 모습 속에서 난 즐거웠다.

흐린날씨의 블레드 호수. 눈은 없었다.
내가 상상한건 이런 느낌 이었는데. 검색해 봐도 꽁꽁 언 호수 사진은 잘 없다.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예상을 빗겨나가기 때문에 여행을 사랑한다


잔뜩 힘주고 찾아갔던 블레드 호수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때 난 어렴풋이 배웠던것 같다. 맘대로 되는 여행은 없다고. 상상했던 장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사기도 당하고 도둑을 맞기도 한다. 시간이 모자라서 혹은 체력이 모자라서 해보고 싶었던걸 못하는 일도 수두룩하다. 지금껏 계획대로 된 여행은 하나도 없었다. 계획한 대로 여행하려면 얼마나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한 지도 알게 되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난 좀 힘을 뺀 여행이 좋다. 계획을 많이 세우더라도 다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미션을 해결하려고 여행하는게 아니니까. 가끔은 길을 잘못들어서 사람사는 골목 풍경을 볼 때도 있고 체력이 다해 노천카페에 앉아 노닥거리는 시간이 즐거울 수도 있다. 숙소 안에서 쉬다가 같은 여행자들을 만나 서로의 여행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도 넘나 즐겁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점 그게 여행의 매력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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