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항사 승무원으로 일하면 짐 싸기 스킬이 느는 이유
외항사 승무원으로 한국 비행을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바로 택배 주문이다. 로스터가 나오자마자 뭘 살지 리스트업 하는 건 물론이고 언제쯤 결제를 할지도 다 생각해놓는다. 바뀐 호텔은 호텔 직원분들이 정말 너무나도 친절하고 감사하게도 택배를 다 맡겨주셔서 분실 건이 하나도 없고 한참 전에 배달을 시켜놔도 내가 도착한 날에 알아서 딱 준비해주시는데 이런 호텔은 사실 드물다. 코로나를 이유로 택배를 안 받아주는 호텔도 너무 많고 받아준다 하더래도 분실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택배 맡기는 일은 승무원들도 호텔 측도 사실 되게 조심스럽고 번거로운 일 중 하나이다.
한국 비행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들은 너무 많다. 음식은 물론이고, 화장품과 각종 마스크팩, 옷이나 신발, 스타킹과 수영복, 자잘하게는 화장솜이나 생리대까지 한국에서 직접 공수해온다. 나 역시 거의 모든 제품을 한국에서 가져오는 편이라 한국에서 돌아올 때면 슈트케이스가 너무 무거워서 애를 먹곤 한다. 다음엔 조금만 싸와야지 해도 막상 한국에 도착하면 나도 모르게 한 짐을 싸와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예전 호텔에서 버스기사 아저씨가 도대체 중동 항공사 (카타르항공과 같은 호텔) 승무원들은 한국에서 뭘 가져가길래 이렇게 무겁냐고 얘길 하신 적이 있었다. 버스기사 아저씨들이 버스 짐 칸에 짐을 실어 날라 주시기 때문에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다. (이거 때문에 그만두는 분들도 있다고) 그 말을 들은 뒤에는 감사하단 말도 거듭하고 가끔 간식도 챙겨드리곤 한다.
회사의 슈트케이스는 두 종류가 있다.
다른 중동 항공사처럼 옆에 달린 손잡이로 끌고 다니는 구버전과 샘소나이트 캐리어 제일 저렴하고 작은 사이즈의 신버전. 난 신버전의 승무원 캐리어가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사이즈가 정말 작아서 짐을 많이 가지고 가야 하는 날에는 구버전을 가지고 있는 동료한테 빌려서 가져가거나 혹은 그만두는 승무원에게 부탁해서 바꾸곤 한다. 난 플랫 메이트가 구버전의 캐리어를 가지고 있어서 빌려준다고 했는데 호기롭게 괜찮다고 했다가 이번에 진짜 애를 먹었다.
난 자타공인 짐을 야무지게 꽉 채워오는데 일가견이 있는데 이번에 엄마가 호텔로 봄여름 버전 운현궁 이불 베개 세트를 호텔로 보내주셔 가지고 이 이불세트를 넣었더니 캐리어가 다 찼다...
딱 이 이불을 보내주셨는데 겨울이다 보니 입고 다닐 겨울 패딩, 플리스, 긴팔 티, 청바지, 양말, 운동화도 넣어야 했고 햇반, 컵라면, 김치, 삼겹살, 참기름, 간장, 떡 등의 음식류와 이번에 새로 챙겨 오는 샤워기와 샤워필터, 샴푸바, 모공 패드와 수분크림 등 화장품을 넣어야 했다. 다행히 테트리스 하듯 어떻게 요리조리 다 잘 넣어서 이번에도 캐리어를 무사히 가지고 왔다. “이걸 어떻게 다 넣어?” 가족들이랑 친구들이 늘 물어봤는데 외항사 승무원 생활 8년째... 캐리어 문만 닫히면 들고 가는 건 문제가 없다.
캐리어를 잘 싸는 팁은 부피가 큰 물건부터 넣고, 모서리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옷은 무조건 돌돌 말고, 양말이나 속옷 등 작은 의류는 파우치에 최대한 작게 접어서 넣는다. 그리고 기내용 캐리어를 적극 활용하는 게 좋다. 난 기내용 캐리어에 과일이나 음식류를 넣어 오는 편인데 이번엔 한국에서 비싼 가방이랑 신발도 들고 와서 박스채로 기내용 캐리어에 넣어서 들고 왔다. 그리고 봄 옷 세 벌과 파우치 세 개까지 넣어서 원래 있던 승무원용 잠옷 + 필수로 가지고 다녀야 하는 여분 유니폼 + 화장품 파우치까지 기내용 캐리어에 다 넣어서 가지고 왔다. 지금 적어보니 어떻게 다 들고 왔는지 모르겠다..
승무원으로 일하면 자잘한 능력치들이 오른다. 오늘 얘기한 짐 싸기 스킬이라던가, 화장을 10분 만에 끝낼 수 있다던가, 쪽머리나 소라머리를 5분 만에 할 수 있다던가,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5개국 이상의 외국어로 말할 수 있다던가, 이 외국인이 이집션인지 튀니지안인지 구분이 가능하다던가… 아직 코로나의 여파로 레이오버에서도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요즘, 이렇게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관찰 중이다. 내가 진짜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맞추는 건데 이건 다음번에 또 포스팅해봐야겠다. 그럼 난 내일 또 다른 능력치를 키우러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