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터슨>을 보고 -
새해가 되면 새 일기장을 편다. 새 일기장이 아니더라도, 페이지를 한 장 뛰어넘는다. '새해'를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페이지 한쪽에 인덱스테이프를 붙여 작년과의 경계를 만든다. 새해, 말 그대로 새로운 해니까. 처음 며칠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적다가 날이 갈수록 일기장을 펴는 일이 드물어진다. 그러다 아주 신나거나 화나거나 슬픈 날, 메말랐던 감정이 극대화되는 날, 오랜만에 일기장을 펼친다. 어이없고 신기한 일을 겪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일기장을 두 권 넘게 썼던 해가 있었는데, 돌아보면 지금까지 중 가장 힘든 해였다. 특별한 일도 갈등도 없이 일상이 밍밍할 때는 딱히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든다.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평온한 날에도 매일 노트를 채워나가는 사람이 있다.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이다. 그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잠에서 깬다. 꽤 이른 시간이다. 시리얼을 챙겨 먹고 '패터슨' 굴다리를 지나 일터로 간다. 회사동료가 출발 신호를 줄 때까지 버스 운전석에 앉아 계속 뭔가를 쓴다. 그리고 차고지를 나선다.
똑같은 노선을 운행하지만 무료하지 않다. 버스 승객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버스 밖 풍경을 유심히 본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지하실에 내려가 시를 쓰다 아내와 저녁을 먹고 반려견과 산책을 간다. 반려견은 문밖에 묶어두고 동네 펍에도 들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언제나처럼 소리가 들리지 않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잠에서 깬다.
영화는 패터슨의 일주일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화요일 아침 패터슨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수요일 아침도 목요일 아침도 똑같은 장면으로 시작될 거라는 걸 짐작하게 된다. 어떠한 놀라움도 없이 이어지는 패터슨의 삶이 그래도 계속 보고 싶은 이유는 그의 시가 궁금해서다. 화면은 비슷하지만, 그 안에 시는 매일 다르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는 것처럼 시도 한 줄 두 줄 켜켜이 쌓인다.
일주일 중 가장 큰 사고는 반려견이 패터슨의 공책을 갈기갈기 찢어먹은 것이다. 성실하게 적어 내려간 시가 한순간 다시 붙일 수도 없게 찢긴 광경을 보고 패터슨은 넋을 놓는다. 다시 시를 쓸 수 있을까.
산책길에서 만난 일본 시인이 풀죽은 패터슨에게 새로운 노트를 선물한다. "때로는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시인이 떠난 자리에서 그가 빈 페이지에 다시 시를 써내려 간다.
소소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자 따분한 일상이 생기를 찾고 삶은 시가 되었다.
들고 다니는 휴대폰, 매일 잡는 문고리, 바닐라 향이 나는 초, 책상에 놓인 미니어처,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꼬마, 동네 식당 간판, 단골 가게 물고기, 그리고 방금 쓴 가위까지.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 숨 쉬는 모든 순간이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