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전문가라고 하기엔 좀 쑥스러운 수준입니다만...
이 이야기는 2019년 12월 청취한 내용을 기반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만두박사, 젠더 말이야... 그래도 좀 아는 편이지?"
"아... 젠더요?"
2019년 12월, 양곤. 제가 찻집에 앉아 입에 만두를 쑤셔 넣는 그 순간, 지도교수님이 그런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묻습니다.
저도 제대로 알리가요(...) 국제기구에서 일하면서 젠더 감수성 트레이닝 받고, 논문 조금 읽은 게 다라고 솔직히 답합니다. 한창 일할 시절 미얀마에서 산모와 신생아 보건 분야에서 잠깐 일했기 때문에 같이 일하는 진짜 전문가들 사이에서 여기저기 주워들은 게 다거든요.
"그래 너가 우리보단 낫겠네. 이 프로젝트 젠더 부분을 좀 챙겨줄래?"
돈 받고 공부하는 입장이니 까라면 까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전을 공부하는 학생이 젠더에도 한 발을 담그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은 젠더를 부담스러워하셨습니다. 저를 포함,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여김에도 불구하고, 모두 젠더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엔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페미니즘의 지지자로 있는 것과, 젠더를 깊이 파는 건 좀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요즘은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지만 아직도 남성이 진지하게 젠더 문제를 연구하려면 접근성이라던지, 연구 도덕이라던지 넘어야 할 허들이 퍽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는 몹시 중요합니다. 더 나은 오늘을 위해 누구든 젠더를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미얀마와 같이 아직도 강한 구조적 남녀차별이 심하고, 특히나 전쟁으로 인해 그 구조적 차별이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는 곳에서는 젠더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을 더 주의 깊게 살펴볼 이유가 있습니다.
상좌부 불교가 삶에 깊이 스며든 미얀마 사람들은 '폰(ဘုန်း - hpone),' 또는 '공덕'이라는 개념이 일상생활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생에 쌓은 공덕이 현생에 영향을 끼친다는 개념인데, 왠지 모르게 공덕을 덜 쌓은 사람은 후생에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 남성은 태어날 때부터 더 많은 폰을 지니고 태어나고, 여성은 남성보다 더 적은 폰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사실 미얀마 여성학자인 탄 탄 느웨(Than Than Nwe)도 지적했듯 딱히 이론적인 실체가 없는 이상야릇한 개념입니다(...)
문제는 이 폰이란 개념이 미얀마 사회 속에서 성차별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미얀마 여성은 전통적으로 대외활동을 하는데 비교적 제약이 없는 편입니다. 사업을 벌이기도 하고, 남성을 대신해 전통적으로 "남자의 일"이라 여겨지는 교섭이나 손님 접대 등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단, 남성이 자리하는 곳에서 여성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그림자로 존재합니다. 남성이 앞에 나서면 여성은 뒤로 물러나야 하고, 남성이 대외적인 이른바 "바깥일"을 챙기면 여성은 마땅히 집안을 다스리는 일을 챙겨야 한다고 여깁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적은 폰을 지닌 만큼,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여성이 얼마나 부정적으로 비치는지, 여성성과 접촉을 하면 폰을 잃는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버마인들은 생리혈을 몹시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여성의 속옷이나 치마도 남성의 속옷과 같이 두면 안됩니다. 버마인 아저씨들이 어찌나 난리법석이었는지, 2007년엔 군부의 폭정에 항의하기 위해 미얀마 대사관에 여성 속옷을 보내는 'Panties for Peace' 운동도 있었답니다. 군부에 종사하는 남성들의 폰을 단숨에 빼앗자면서요.
따라 불교 사원에서 여성은 불상, 또는 탑에 가까이 갈 수 없고, 승려와 신체 접촉을 해서도 안됩니다. 특히 생리 중인 여성은 아예 사원에 들어가는 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보시를 할 때도 승려와 그 어떠한 접촉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근처의 남성을 거쳐 대신 전달하게 하거나, 아니면 상 위에 놓고 승려가 그걸 집는 식으로 원격(?) 보시를 해야 합니다.
공덕을 열심히 쌓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여성은 공덕을 쌓는 게 참 어렵죠?
*따라, 남성들도 소위 "바깥일"을 잘 챙기지 못하면 깊은 멸시를 받습니다. 남성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야 하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벌어와야 한답니다. 이런 멸시를 제일 크게 받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질환 덕에 살림을 놔 버린 남성 마약 중독 환자들입니다.
까친 주에서 마약 위해 감축(harms reduction) 활동을 하시는 분의 말에 따르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주기적으로 자기 사무실 앞에서 마약중독 치료를 받는 남편들을 발가벗긴 채 매 타작을 하고 조리돌림을 시킨다고 합니다. 동네 아이들을 시켜 어느 집 아저씨들이 마약 치료센터에 출입하는지 지켜보고 고자질하게 한 후 저녁에 일망타진(?)을 한답디다. 그분은 그런 식의 환자 린칭이 마약 위해 감축 활동에 제일 큰 걸림돌이라고 토로했었습니다. 저 꼴을 당하느니 그냥 숨어서 마약하고 만다는 환자들이 많다고...
이런 남성우월주의는 사회적 기회 측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보통 여자 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게 더 많은 교육 기회를 양보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남자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여자 아이들은 집에서 일손을 돕거나, 아니면 일찍 취직해서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또 미얀마 사회에서 "바깥일"을 챙기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남성인 만큼, 여성이 남성을 밀어내고 일자리를 얻는 것은 몹시 힘든 일입니다. 만에 하나 일자리를 얻는다 하더라도, 남성보다 확연히 적은 급여를 받습니다.
아무래도 제일 심각한 문제는 여성이 토지소유나 재산권 행사에 큰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얀마는 공식적으로 재산 소유에 성별에 따른 제약을 두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재산권을 행사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이 (남성을 제치고) 재산권을 행사하는데 부정적인 인식이 있기도 하지만, 여성들이 관공서로 가 남성 공무원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재산권을 행사하는걸 몹시 꺼려하기 때문이랍니다. 따라 여성이 가장인 가족은 비교적 더욱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젠더 조사를 위해 만난 한 활동가는 여성이 이렇듯 사회적으로 큰 차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성차별을 그저 종교적 관습, 또는 문화적 차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게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이 분은 뭘 모르고 그냥 그런갑다- 하며 지내는 남성들보단, 이런 구조에 스스로 순응하는 여성들의 인식을 바꾸는 게 제일 시급하다고 말합니다:
"많은 미얀마 여성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악습이라 여기지 않고 그저 문화라 여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걸 바람직하다 여겨요. 많은 여성들이 아직도 여성차별 박스 안에 갇혀 있고, 스스로 나오려 하지 않아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들만 문제인 게 아닙니다. 많은 미얀마 남자들이 자기 가족 안에서 차별적인 관습을 고치려 하더라도 시어머니들이 강력히 반대하는 경우가 많답니다. 남자 탓, 여자 탓보단 세대를 타고 내려오는 여성차별적 구조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든다고 해야겠습니다."
이런 남성 우월적인 젠더 구조가 전쟁터에서는 물리적 폭력과 결합해 더 큰 피해를 끼칩니다. 분쟁 지역에서 사는 미얀마의 소수민족 여성들은 버마인 여성들보다 여성차별의 피해를 더욱 심각하게 겪고 있습니다.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커버 이미지 - Moe Moe Kham, Senior Nurse in Mat Moe Hospital (3MDG/UNO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