렙업 했습니다ㅎ_ㅎ
아마 2017년 초봄이었을 겁니다.
제가 퇴근 후 에머이에서 쌀국수를 흡입한 후의 일입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날, 저는 한숨을 크게 내쉰 후 서울 종로 어딘가의 상가 입구에서 어머니에게 카카오 보이스톡을 했었습니다. 박사 지원을 하고 싶어서 먼저 어머니에게 허락을 구하려고요.
캐나다 동부시간으로는 이른 아침, "어~ 아들 왜?" 하시며 전화를 받으신 어머니 목소리 뒤에는 헤어 드라이기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당신이 출근 준비를 바삐 하시는 와중에도 아들 전화라 받으신 거겠지요.
"엄니 제가 있잖아요... 박사과정에 지원해 보려고 하는데요"
"... 그래~ 공부는 많이 하면 좋은 거니까. 엄마 출근해야 하니께 나중에 또 전화하자잉"
어머니는 아주 잠깐 생각하시곤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21년, 저는 박사 후보생이 되었습니다.
토론토 대학교의 박사과정 단계는 크게 나누어 전공에 대한 기본 역량 쌓는 박사 학생 (PhD student)과, 기본 역량이 잘 쌓였으며 의미 있는 연구과제를 수행하고자 함을 확인한 후에 될 수 있는 박사 후보(PhD candidate)로 나뉜답니다.
박사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연구제안서를 아주 맛깔나게 잘 써야 하지만, 제 박사논문 연구를 지도할 수 있는 논문지도 커미티(Thesis supervisory committee)도 짜야합니다. 학생, 또는 지도교수 취향에 따라 지도교수 1인과 커미티 멤버 2인, 총 3인의 커미티를 구성하는 게 보편적입니다.
대부분의 커미티는 박사생의 연구과제 중 지도교수가 잘 지도할 수 없는 분야, 또는 방법론을 책임질 수 있는 전문가로 구성됩니다. 가령 학생이 통계적인 연구를 하고 싶지만 지도교수님이 정량적 방법론 전문가가 아닌 경우 통계 쪽 전문가를 커미티로 초대하거나, 가령 앙골라 내전을 사례연구로 삼아 연구를 하고 싶은데 지도교수님이 아프리카 전문가가 아닐 경우, 앙골라/아프리카학 전문가를 넣는 식입니다.
어떻게 보면 온라인 게임 파티 구성과 비슷합니다. 인던 들어가는 파티에 딜러만 있으면 곤란합니다. 탱커와 힐러도 필요합니다. 논문지도 커미티도 역할분담을 기술 있게 잘해야 양질의 지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박사과정을 위해 대학원을 진학할 경우 학교 네임밸류보단 나의 연구 관심사와 학과 교수진 간의 접점, 이른바 'fit'이 있는지를 잘 확인해야 합니다.
보통 접점이 없다 생각할 경우 학교에서 먼저 지원자를 거릅니다만, 만에 하나 아주 좋은 학교를 들어가게 되더라도 알맞은 지도교수님이 없으면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없어 허송세월을 하거나, 학교를 떠나는 일이 잦습니다. 제 동기 중 하나도 같이 일하고자 한 교수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학교를 옮겼습니다.
저의 경우 미얀마를 주요 사례연구 지역으로 삼아 미얀마 정부군과 소수민족 무장단체 간 경제적 교류가 제 연구주제이기 때문에 미얀마 전문가를 지도교수님으로 모셨습니다. 다만 교수님이 반군 정치, 내전 양상, 그리고 통계학적 방법론엔 본인보다 더 나은 전문가들이 있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주로 통계학적 방법을 통한 내전 연구를 하는 교수님 1인, 반군 정치 전문가 1인을 모셔 총 3인의 커미티를 구성했습니다.
두 분 다 제 연구과제를 잘 이해하시고 그 가치를 인정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논문은 완성된 논문이고, 가장 좋은 연구제안서는 컨펌받은 연구제안서입니다. 지도 커미티 교수님들은 제안서의 기술적인 완벽함보다는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가 왜 중요한 문제인지, 선행연구가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해 좋은 해답을 주지 않았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방법을 통해 이 연구를 수행할 것인지 증명하는 것을 몇 배는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그 기준을 어느 정도 충족한 연구제안서 초안은 모든 커미티 멤버가 모이는 커미티 미팅을 통해 연구제안서의 통과 여부를 결정합니다. 통과를 위해서는 만장일치가 필요합니다. 학계는 물론, 만장일치가 필요한 모든 일이 다 그렇듯, 한방에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연구제안서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사실상 커미티 멤버가 모두 모여 박사생의 연구과제에 대한 공통된 피드백을 주는 자리에 가깝습니다.
저 또한 커미티 미팅을 통해 쏟아지는 교수님들의 피드백과 개선사항을 전달받았습니다. 연구 방법론을 좀 더 세밀하게 기술하라,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논문과 책들을 더 읽어보고 제안서에 인용해 달라는 비교적 간단한 요청이 있는가 하면, 제 연구 대상(반군단체의 경제활동) 선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그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조금 복잡한 요청사항도 있었습니다.
"근데 뭐 연구과제가 아예 엎어지는 정도의 코멘트는 없는 것 같고... 만두박사 어때? 조금만 고치면 되겠지?"
미팅을 마무리하며 지도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넵 교수님, 할만합니다"
"응 그럼 2주 내로 이거 고쳐서 다시 보내줘"
"2주요...?"
까라면 까야합니다. 열심히 고쳐서 개선점을 퍽 상세히 나열한 이메일과 함께 교수님들께 수정본을 다시 제출했습니다. 몇 주나 지났을까요? 답신이 왔습니다. 교수님의 답신은 항상 제 이메일 길이와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안녕 만두박사, 잘했네! 제안서가 참 좋은 것 같고 이제 통과시켜도 될 것 같다. 코멘트를 몇 개 달긴 했는데 제안서 자체에 손을 댈 필요는 없어. (커미티 멤버) A랑 B에게도 이메일 보낼게."
만두박사생이 만두박사후보로 전직하는 순간입니다.
2019년 12월, 지도교수님과 양곤 어딘가에서 차를 마시던 날, 만두를 뜯으며 제 연구주제 내용을 가만히 듣던 교수님은 그 주제가 과연 박사논문으로 쓸 만한 주제다- 말씀하신 뒤 당부의 말씀을 뒤에 붙였습니다.
"전쟁이나 폭력에 대한 연구는 항상 위험해. 현장 연구가 불가능해서 연구과제 자체가 엎어지는 위험도 크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너 스스로가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 왜 E 교수 학생... 이름 뭐야, 걔 어떻게 됐는지 알지?"
"넹 그럼요 알다마다요"
학계에서 정치 에스노그라피로 저명한 E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둔 그 학생은 몇 년 전 어느 독재국가 안에서 연구를 하다 간첩 혐의로 몰려 감금되었었습니다. 학계의 구호활동으로 입국 금지 처분만 받고 간신히 풀려난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뭘 하는지 저는 소식을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이 피식 웃으며 말씀을 이어나갔습니다:
"너도 똑같아. 개 쩌는 논문을 쓰던지, 20년 후에 석방돼 베스트셀러 자서전을 내던지"
우스갯소리로 비속어를 섞어하신 말씀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웃는 게 웃는 게 아닙니다. 지도교수님 또한 동남아에서 현장연구를 하던 중 실수로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가 간신히 벗어난 경험이 있었거든요.
세계가 좀 더 빡센 곳이 된 지금, 정치학자들은 크고 작은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작게는 극성맞은 개인이나 몇몇 국가의 정부 기관으로부터 연구를 방해하기 위한 협박성 이메일이 날아오는 경우가 있지 않으면, 크게는 권력자들이 보기에 민감한 연구를 했다는 죄 하나로 위 언급한 그 학생처럼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준의 심각한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
따라, 제안서의 내용의 퀄리티와는 별개로 교수님들이 제일 걱정스럽게 생각하신 부분은 연구의 실행 가능성과 연구활동의 위험성이었습니다. 쿠데타 정국에 놓인 미얀마는 당분간 연구는커녕, 방문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어 미얀마 현지 내 연구가 몹시 어려워졌습니다. 소수민족 반군과 미얀마 군부 간 격전이 이어짐과 동시에 대도시 안에서도 반군부 세력에 대한 암살, 폭탄테러, 그리고 군부의 무자비한 폭력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교수님과 상의한 후 미얀마 대신 태국 국경지역에서 연구하며 기회를 보기로 했지만, 그래도 제 안전이 보장된 건 아닙니다. 무장단체를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있거든요. 내전을 연구하며 얻는 정보는 각국 정보부가 원하는 정보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리고 치외법권 지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교류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 안전을 확실히 챙겨야 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미얀마 언론사에서 기자를 하는 친구가 지금 미얀마 군부에게 구금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남 일이 아닙니다.
또, 연구자료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기밀유지에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나쁜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연구 참가자들이 큰 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일례로 엘 살바도르 내전의 반군 참가자들을 연구한 엘리자베스 우드는 훗날 미 육군 보병학교가 자기 저서를 엘 살바도르 장교들의 대 게릴라전 위탁교육 자료로 사용했음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연구 참가자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이름과 지명을 익명화해서 망정이지, 아직도 아찔하다고 합니다. 그는 엘 살바도르 내전 당사자가 자기 저서를 통해 연구 참여자들을 유추해내진 않을까 아직도 걱정한답니다.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후, 저는 아주 열심히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래도 퍽 진지하게 대학원 지원 준비를 했었습니다.
퇴근 후, 그리고 주말마다 카페에 가지 않으면 제 하숙 방에 앉아 GRE 교재와 씨름했습니다. SAT 영단어 사전을 통째로 외우는가 하면, 영수가 40킬로로 달리고 영희가 30분 후 50킬로로 달리면 몇 시간 후에 만날까~ 등의 아주 간단하지만 저에겐 전혀 쉽지 않았던(...) 수학 문제를 풀기도 했었습니다. 쉽사리 오르지 않는 GRE 모의시험 점수를 보며 과연 내가 어드미션을 받을 순 있을까? 받더라도 다시 공부를 할 순 있을까 많이 초조했었습니다.
그런 제가 '내가 이거 한다고 합격이나 할까?'에서 '내가 좋은 연구자가 될 순 있을까?'로 초조함의 원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때를 되돌아보면 지금 참 멀리 온 것 같습니다.
만두박사의 시작은 지극히 미약했지만, 나중엔 심히 창대할 수 있을까요? 일단 현장연구를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