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은 연구제안서 쓰기 전과 후로 나뉜답니다.
생화학 연구자 아이작 아시모프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답니다:
"과학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였을 때, 가장 흥분되는 구절은 '유레카!'가 아니라 '거 참, 희한하군'이다"
개인적으로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박사과정을 하는 학생들은 뭐를 읽다가, 다른 연구를 하다가, 아니면 친구들과 함께 멱살 잡고 심도 깊은 토의를 하면서 누구든지 "어? ㅅㅂ 잠깐만?" 하는 순간을 거치게 됩니다. 선행하는 연구가 커버하지 않는 미지의 연구영역, 또는 현존하는 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이상야릇한 불규칙적인 현상이 눈이 보이는 것이죠.
그리고 그 "어? 잠깐만?" 이란 생각을 불러일으킨 무언가는 으레 박사생의 연구과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연구과제를 컨펌받기 위해 연구제안서란 물건을 쓰게 된답니다.
대학원생들이 박사논문을 쓰기 전 먼저 써야 하는 이 연구제안서는 실제 연구를 들어가기 전, 지도교수에게 1) 박사논문을 어떤 것에 대해 쓸 것인지, 2) 왜 그 연구과제가 연구할 가치가 있는 과제인지, 3) 어떤 방법으로 연구조사를 할 것인지 소상히 밝히는 문서랍니다. 박사논문을 쓰는 것은 퍽 오랜 시간이 들고, 많은 경우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 크고 작은 돈을 들여가며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거치기 전에 먼저 당해본 사람 교수진에게 먼저 연구과제를 컨펌받으라는 의도지요.
그리고 제가 당해본 바, 이 과정을 통해 박사생이 하나의 연구자로서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지, 그 연구역량을 마지막으로 가늠하고자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박사논문은 사실상 책 한 권 분량의 연구보고서를 써내는 작업인 만큼, 연구자로서의 역량이 갖춰지지 않으면 시작하기 몹시 어렵습니다 (솔직히 연구제안서를 컨펌받은 친구들도 연구를 어떻게 시작할지 막막해하는 친구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 역량이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 연구제안서는 대부분 반려됩니다. 다른 상황에서는 느긋한 교수님들도 연구제안서 앞에서는 한없이 깐깐하고 엄격해질 때가 많거든요.
같이 연구제안서를 쓰기 시작한 제 친구 중 하나는 지도교수님에게 자기 연구 주제가 과연 연구할만한 주제인지 설득하기 위해 몹시 긴 시간을 선행연구를 확인하는데 보냈습니다. 다른 한 친구는 본인 연구 주제가 캐나다 연방정부 연구기관에서 장학금을 받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도교수님과 연구제안서의 내용을 가지고 열심히 주고받고 있답니다. 저도 지도교수님에게 최종 오케이 싸인이 나올 때까지 지난 1년간 초안 파일 버전만 18개가 넘어갔습니다.
개인적으로 넘겨짚건대 박사논문 연구는 생각보다 큰 비용이 드는 만큼, 지도교수 입장에서는 밑 빠진 대학원생에게 연구비를 붓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자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본인이 가르치는 학생이 부디 좋은 연구과제를 골라잡아 최대한 빨리 졸업을 하고, 연구자로서 취업에 한걸음 더 가까이 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크겠지요.
마음씨 곱고 후덕하신 교수님들이 갑자기 금강야차 버금가는 양반들이 되기 때문에 연구제안서 앞에서 고꾸라지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장학금 기한이 다 되도록 연구 관심사를 연구주제로 바꾸지 못하거나, 아니면 연구 주제를 가지고 지도교수님과 주고받고 하는 프로세스를 인내하다 지쳐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박사과정 중퇴의 많은 숫자는 전공시험 단계에서 솎아져 나가는 게 아니라, 연구과제를 만들어내지 못해 사라지는 학생들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지금은 피렌체에서 포닥을 하는 한 친구는 술에 거나하게 취했던 어느 날, 이 모습을 직접 겪은 것을 "언젠가 학교에 와 보니 같이 세미나를 들었던 친구들 소식이 뚝 끊기고 다들 사라졌더라"고 설명했었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저도 주변에 연락이 잘 닿지 않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와 사전 공부는 물론, 많은 끈기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사실 어떻게 극복하는 게 제일 좋을지 모범 답안은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함께 공부하는 학우들과 함께 각자의 연구주제에 대해 수다를 떨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과거 연구자들이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영역, 또는 현존하는 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불규칙적 현상을 들여다 보는것은 어쩌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리고 그 미지의 세계를 제정신으로 탐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뻔뻔함(...)이 요구됩니다.
미지의 세계에 위치한, 학생도 놀라고 지도교수님도 놀라는, 그런 연구주제는 사전 연구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전에 어떤 논의가 있었다-라고 규명할 것도 딱히 없고, 연구 문제의 위치를 어디에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애매해집니다. "헉 이게 뭐야?" 하는 순간을 연구주제로 가져갈 것이다 결심했으면, 막막함을 어느 정도 이겨낸 후 그 연구주제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을만한 분야를 긁어모아 폭넓게 읽으며 연구 주제의 위치를 억지로(?) 잡아 만들어야 합니다. 상상력과 용기도 필요하지만, 굉장히 큰 뻔뻔함이 요구되는 작업입니다.
함께 박사 공부를 하는 친구들끼리 자주 하는 말 중에 "fake it 'till you make it (될 때까지 가라 쳐라)"*이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주 합니다. 어찌나 자주 하는지,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들에게도 해 줍니다. 막무가내로 얍! 했는데 헛? 하고 될 때까지 어떻게든, 뻔뻔하게, 우당탕쿵탕(...) 해 보라는 애정을 담아서.
사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연구 주제가 미지의 영역인 만큼,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도 드물고, 내가 뭘 읽고 어떤 이론을 갖다 붙이는지 토를 달 사람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어차피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가설을 수정하거나, 아니면 "와 이게 진짜 된다고?" 깜짝 놀라거나 하며 박사논문을 쓰는 만큼, 일단 되는대로 끌어모아 들이밀어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제 주변만 그런 게 아니라 나이 지긋한 교수님들도 같아서, 계량경제학자 울드리지 (계량경제학 교과서 쓴 바로 그 울드리지)는 최근에 트위터를 통해 동료 통계학 연구자들에게 "긴가민가 하는 지엽적인 통계 이론에 힘주지 말고 통계학은 큼지막하게, 쉽게 가르쳐라"라고 아주 둘러 둘러 조언한 바 있습니다.
저도 내전 연구 프로포절을 쓰기 위해 정치학 문헌을 넘어, 경제학, 경영학, 범죄학, 심지어 주식 거래 매뉴얼까지 닥닥 긁어다 찾아 읽고 있습니다. 사회과학은 물론, 타 학과에서 관련한 다양한 문헌들이 제 연구주제에 대해 아주 자그마할지라도 어떤 언급을 했고, 연구주제의 어떤 부분에 대해 논의가 전혀 없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제 문헌 검토의 주가 됐답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거나, 봤지만 무시하고 넘어간 연구주제를 들여다 볼만한 연구주제라 우기며 내세우기 위해.
어떻게 보면, 남이 들여다보지 않은 질문을 찾아다 던지는 대학원생들은 힙스터와 비슷한 면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힙스터 라이프스타일이 그렇듯, 대학원생의 길도 언뜻 보면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 몹시 위태롭고 야매로운(?) 길임이 분명합니다.
제 논문은 어떻게 될까요? 일단 현장연구를 나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