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두박사 Apr 23. 2022

"나는 정글에서 50년을 싸웠어"

2022년 미얀마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전쟁 -4-


이 글은 2022년 봄 태국에서 청취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현재 미얀마 곳곳의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이유로 모두의 안전을 위해 지명과 인물명, 그리고 현장 사진은 공개하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최근 태국 어딘가에 위치한 무장단체 연락소에서 소수민족 무장단체 지도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편의상 그를 선생님이라는 뜻의, '사야'라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연락소의 주소를 받아 찾아간 그곳은 사실 누가 보면 이곳에 초법적 괴한(?)들이 드나드는 곳이라고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조촐한 주거지역에 마련돼 있었습니다. 그저 건물 앞에 영어로 '사진 촬영 금지'라 쓰인 팻말이 이 장소의 성격을 에둘러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게이트 밖에서 제 얼굴을 본 친구가 문을 열어줬습니다. 연락소 안으로 들어서니 보도자료 사진의 배경이었던 건물 안의 가구며, 풍경이 눈에 아주 익었습니다.


"아, 한국군 군복을 입으셨군요?"


그곳에서 만난 사야는 한국군 구형 전투복을 걸쳤습니다. 병장 계급장에 예비군 마크까지 떡하니 달렸습니다. 아마 군 복무를 한참 마친 분이 처분한 옷이 어떻게 동남아까지 흘러 들어간 것이겠죠? 민망하셨는지, 아니면 드디어 자기 옷의 정체를 알아보는 한인을 만났다는 기쁨이었는지 사야가 껄껄 웃으며 명찰을 가리키며 묻습니다. 


"아 이거? 허허 어디선가 잘 구했지. 기갑부대에 있었던 사람 군복이야. 한국어 읽나? 이 옷 주인 이름이 뭔가?"


"헤헤 아이고, 이렇게 발음하는 이름입니다. HONG..."


사야에게 명찰에 쓰인 이름을 영문으로 바꿔 써드리자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읽고 제게 물으며 본인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지 확인하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입은 옷이었을까요? 어쩌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그와 함께 희로애락을 함께 했을 그 군복의 원래 주인이 무척 궁금하셨던 모양입니다.


"홍... 홍길동... 이제야 옷 주인의 이름을 알아냈구먼! 허허 정말로 고마워요"




미얀마 소수민족 무장투쟁사의 살아있는 역사


사야는 1970년대에 무장항쟁에 투신했습니다. 무장 독립투쟁에 일생을 바친 사람답게, 그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미얀마'라는 명칭을 거부했습니다. 미얀마는 군부가 나라 이름을 바꾸기 전의 이름인 '버마'로, 사실 직역하자면 '정부군'이라는 뜻인 미얀마군 '땃마도'는 (결코 정부군이 아닌) 버마족의 군대란 뜻을 담아 '버마군'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비록 같은 조직은 아니었지만, 한때 카렌 민족해방군의 초기 지도자이자 전설인 만바잔(Mahn Ba Zan)과 함께 했었다고 자랑했습니다.


2018년, 한때 만바잔이 몸을 담았던 카렌 민족해방군 소속의 병사가 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95년 본거지가 전소된 KNU는 기록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 Steve Sandford 

그런 사야는 미얀마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미얀마 무장항쟁의 1세대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가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게 역사책에 공란으로 남은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사실관계를 알려주는 팩트는 물론, 그 뒷얘기에 대한 비사도 함께 돌아왔습니다. 사실 인터뷰 내내 사실관계 보단 그가 수십 년 간 쌓아온 뒷담화(?)를 더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중 이제 역사가 된 한 토막만 예를 들자면:


"그래서, 욧석 장군은 왜 1996년 항복을 거부한 겁니까?" (쿤사 연재 편 참조)


"그야 샨 민족주의자였으니까. 계속 싸우고 싶었던 거야. 그때 한참 어렸어 그 사람. 욧석이 아마 몽타이군에서 소대장인가 했었을 거야. 사실 욧석 항복하고 쿤사랑 같이 따웅지까지 갔었어. 그다음에 슬그머니 빠져나와 태국 국경으로 냅다 뛴 게 시작이야. 그 친구 처음엔 몽타이군이 숨겨놓은 무기를 다 파내서 그걸 가지고 싸웠어."


"그러니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걸 반복하자면: 몽타이군이 항복할 때 무기를 숨겼다는 말씀이죠?"


"껄껄, 그렇지! 쿤사가 항복할 때 무기를 다 꺼내 가지고 버마군한테 퍼준 게 아니야. 숨겨놨었지."


미얀마를 수십 년간 연구한 사람들의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 비범한 비사가 튀어나온 순간입니다.


사야는 그의 인생이 굽이쳐 나온 흐름을 무척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어디 양곤 찻집에서 만난다면 동네 할아버지겠거니- 생각될 정도로 푸근한 인상을 가진 분이신지라 그의 현역 시절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말입니다. 그는 미팅 내내 그와 그의 전우들의 투쟁정신을 강조했습니다. (아마 무장단체들의 사업활동을 연구하는 약간 집요했던 제 질문을 에둘러 거절하기 위해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나 하는 얘기지만, 정글에서 싸우는 건 무척 고달픈 일이야. 덥지, 배고프지, 도시에서 산속으로 처음 들어오면 뭐 풀떼기 말곤 아무것도 없고..."


그가 조금 숨을 고른 후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 하지만 만바잔이 내게 얘기한 게 있어. 혁명가들은 절대 돈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고. 이권을 생각하면 혁명정신이 무너지기 마련이라고. 돈을 만지고, 서로 이해관계가 생기기 시작하면 우리 마음속에 혁명적인 희생정신이 아닌 이기심이 싹튼다고 했었어."


사격훈련 중인 카야 인민 방위군 지원자. 아마 사야도 과거 그와 똑같은 길로 투쟁의 길을 선택했겠지요? / KNDF


"우리 혼자서는 할 수 없지. 아무도 우리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아무래도 돈 굴러가는 얘기가 불편하신 듯해서 화제를 현 시사 이슈로 돌렸습니다. 인생을 정글 속에서 보낸 그는 현재 미얀마의 상황에 대해 큰 걱정을 내보였습니다. 현재 미얀마 민간정부와 군부 간의 전쟁을 '버마족 간의 내전'이라 규정한 그는 미얀마 내전의 양상이 무기를 들었던, 들지 않았던 서로 죽고 죽이는 무분별한 폭력으로 치닫은 상황에 근심이 깊었습니다. 여느 내전이 그렇듯, 미얀마 또한 서로가 서로를 군부 편, 민간정부 편이라 고발하며 서로 죽고 죽이고 있기 때문이죠


글을 쓰는 지금도 미얀마의 한 코미디언이 그저 반정부 노선을 탄 연예인들과 연줄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군부에게 납치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반면 최근엔 미얀마 중앙은행 간부가 저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연락소 게이트를 열어준 그 친구는 자기 양곤 집 앞에 경찰 초소가 있어 수류탄이 너무 자주 터진다는 이유로 태국으로 전근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비극이야, 비극. 적어도 우리들은 그렇게 선을 넘진 않았어. 우린 총을 들지 않은 사람은 해치지 않았단 말이야. 자고로 전쟁엔 회색지대란게 있단 말이야. 대다수의 사람들은 편을 들고 싶어 하지 않아. 그저 살고 싶어 할 뿐이지. 누구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하지 않는다며, 누구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한다며 민간인을 죽이고 그러는 건 옳지 않아." 


"그렇군요."


"왜 이번 띤쟌엔 버마군이 주최하는 띤쟌 축제에 폭탄 공격을 할 거라 했다지? 띤쟌을 즐기는 게 어떻게 버마군을 지지하는 게 되나?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버마족이 버마족을 죽이는... 이런 참극을 얼른 멈춰야 해."


내전과 폭력을 공부한 제 입장에서도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말이었습니다. 지금껏 미얀마 군부의 무자비한 폭력에 치를 떨었던 저는 사실 제가 과연 미얀마 군부와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웃는 낮으로 볼 수 있을까, 아주 깊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언젠가는 논문 연구를 위해 미얀마 군부 사람들도 만나야 했기 때문에, 연구중립성을 위해 제 사감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전쟁이 나고 민족이 둘로 갈라져도, 삶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정치에 상관치 않고 자기 인생에 충실하겠다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사야는 그런 그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버마족이 지금껏 그와 그의 형제자매들에게 보낸 조소와 무관심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마인들을 미워하는 대신 용서와 화해를 택했습니다.


"버마가 전쟁을 한 지 70년이 됐잖아? 나는 정글에서 50년을 싸웠어. 나는, 정글 속에서 평생을 보낸 내 생각엔, 싸우는 건... 싸우는 건 해답이 될 수가 없어."


그는 그가 '버마인이 버마인을 죽인다'라고 표현한 현재 미얀마 사태를 해결할 방안으로 비 버마족 무장단체들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많은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이 미얀마 민간정부와 군부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들이 버마인들의 싸움의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고 봤습니다.


"버마에서 벌어지는 이 참상 속에서 우리 비 버마 민족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 있어. 서로 살육을 멈춘 후 대화로 나설 수 있도록 우리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이 버마인들 사이에서 조율을 해야지."


"과연 그렇다면 두 세력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휴전 단체들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야는 맞장구를 치는 저를 지긋이 바라보시더니, 조금 쓸쓸한 목소리로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혼자서는 할 수 없지. 아무도 우리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한 시간 남짓 걸린 인터뷰를 마무리하자 그가 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연로하신 분에게 너무 집요하게 질문을 했나, 조금 실례했다 싶어 마음이 무거웠는데, 다행히 크게 개의치 않고 손을 굳세게 쥐어 흔들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퍽 마음에 드셨는지, 또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만두박사! 그러면 다음에 또 봅시다. 난 항상 여기 있으니 언제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방문해요."


"그럼요, 다음에 꼭 만나뵈러 다시 오겠습니다"


사야는 지금껏 만난 사람들 중 제일 거물이었지만, 큰 인터뷰를 따냈다는 기쁨보다는 씁쓸함과 슬픔이 앞섰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그의 말, 그리고 자기가 한 말을 서방 언론과 연구진들이 그대로 전하진 않는다는 그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습니다.


50년을 정글에서 싸운 그분은 이제 고향의 평화를 누구보다 더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수민족 동지들이 이제 더 이상 버마인들에게 핍박받고 하는 것을 원치 않아했습니다.


그런 그의 바람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 제 스스로 낸 질문에 쉽사리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배경 사진: A Kachin Independence Army soldier stands at a frontline outpost in northern Kachin state, Myanmar, March 20, 2018 / Associated Pres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