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2년 00월 중 청취한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미얀마-태국 국경지대는 무력충돌이 계속되는 굉장히 불안정한 지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의 안전을 위해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익명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만두박사 - 우리 00월 00일에 출발하는데, 같이 가는 거 맞지?"
"정말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미 다 조치해놨어. 장군님도 이미 보고받았다. 코로나 시국에 들어온다니까 놀라워하던데?"
00월 00일, 저는 미얀마 샨족 소수민족 무장단체 중 하나인 샨주회복위원회(RCSS), 또는 샨주 남부군(SSA-S)의 본부인 로이따이렝(Loi Tai Leng)으로 가는 차에 올랐습니다. 예부터 용맹한 전사로 이름을 날린 그들은 지금도 호랑이와 같은 기세로 샨주의 자결권을 위해, 그리고 샨 민족의 폭력과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일정은 대충 열흘.
해뜨기 전엔 추우니 두꺼운 옷 하나쯤은 들고 갈 것.
만나는 모두와 인터뷰 가능하되, 전투 보직을 맡은 군인과 인터뷰할 시 최상부의 허가 필요.
제게 내려온 위 지침을 숙지한 후, 대충 짐을 싸고 RCSS 장교 A와 접선해 국경지대로 올라가는 다른 장교들과 합류해 태국 북부의 산길을 오르내렸습니다.
누군가가 태국 국경지대의 산세는 마치 산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이 높고 가파르다고 했던가요? 정말 그랬습니다. 구불거리는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길 수천번,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총을 맞아 죽는 게 아니라 산길에서 차가 뒤집어져 죽겠구나- 생각이 들 때쯤 태국 국경수비대 검문소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과연 모든 조치(!)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는지 제가 탄 차는 하이패스에 준하는 속도로 검문소를 통과합니다.
검문소를 몇 개나 통과했을까요? 포장도로가 여기저기 깊게 파인 비포장도로로 바뀝니다. 분명 태국 국경 안에 있는 땅이지만, 태국 정부가 관리하지 않는 무인지대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제부터 고르지 못한 길을 탄 차가 좌우로 흔들리며 디스코팡팡 못잖은 스릴을 선사합니다. '아이고오 태국 놈들 지들 땅인데 콘크리트라도 깔아주지...!' 하며 험한 욕을 속으로 한참 삭히고 있으면 RCSS라 써 붙인 검문초소가 나타납니다.
미얀마 샨주 혁명의 중심이자 RCSS의 본부, 로이따이렝에 도착한 것입니다.
산길을 아마 대여섯 시간을 넘게 달려 통과한 마지막 검문소는 태국 군인들이 아닌 샨주 남부군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들어오는 차를 알아본 초병이 냅다 경례를 붙입니다.
"믕 따이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입국심사가 면제되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앞자리에서 창문을 열고 쿨하게 날린 경례로 남부군 초병의 탐문을 대신한 A가 저를 돌아보며 우스갯소리를 날립니다. 샨어로 '믕(Muang)'은 나라, '따이(Tai)'는 샨족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즉, '믕 따이'를 직역하자면 샨족의 나라, 즉 샨국이란 뜻이 됩니다.
로이따이렝은 전방에서 돌아온 여단의 숫자에 따라 마을 인구수가 달라지고, 저녁 10시-오전 5시 통금이 있는 군사요새입니다. 실제로 2005년엔 UWSA(와주연합군)와 미얀마 군부의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60일 동안 모두들 생각도 하기 싫다는 혈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는 병사들과 주민들, 그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요새가 아니라 조용한 산골 마을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중간에 합류한 연락장교 짜이* B가 차에서 내려 콘크리트 도로를 기점으로 손가락으로 좌우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이쪽은 믕 따이, 이쪽은 프라텟 타이 (태국)! 여기가 로이따이렝이야"
로이따이렝은 샨주-태국 국경 바로 위에 있습니다. 태국과 어찌나 가까운지, 이곳 사람들은 미얀마 심카드가 아닌 태국 심카드를 사용합니다. 화폐도 미얀마 짯이 아니라 태국인들과 거래할 때 쓰이는 태국 밧을 사용합니다. B가 만약 현금이 떨어지면 동네 슈퍼에 가서 태국 QR페이(!)로 계좌이체를 하고 현금을 받으면 된다고 손짓 발짓으로 귀띔해줍니다. 가끔 태국 국경수비대와 국경을 넘나드는 태국 특수부대원들이 로이따이렝으로 장을 보러 온다고도 합니다.
병사들과 함께 분주하게 차에서 짐을 내리고, 제가 지낼 곳을 안내받았습니다. "특별히 조식 중식 석식이 포함된 4성급 호텔시설로 준비했다"는 A의 우스갯소리와 함께 내무실에 짐을 풀었습니다. 같은 침상을 쓰는 병사들, 그리고 B가 이불을 펴 주고 혹시나 외국인이 추워할까 담요로 여러 장 더 건네줍니다. 특별대우 없이 병사들과 함께 지낼 수 있어 다행이고, 또 더 잘됐다 싶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병사들과 술도 마시고 누워서 같이 유튜브도 보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지금부터 풀어낼 그들의 이야기를 아래 간략히 소개합니다.
*'짜이'(Sai)는 샨족 남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영어의 '미스터'와 흡사합니다. 여성은 '낭(Nang), ' 어르신은 '눙(Nung)'이라 부릅니다. 계급이 높은 사람은 '군주'라는 뜻인 '짜오(Sao)'라 부르며 존대합니다. 옛 샨족 지배자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던 '짜오파(Saopha)'와 같은 어원입니다.
같은 내무반을 쓰는 한 장교와 산책을 나간 어느 날, 인사하러 들어간 동네 마트에서 불닭볶음면을 발견했습니다. 한봉 50밧. 누가 어떻게 이걸 여기까지 싣고 들어왔을까요? 현지 물가에 비해 참 비싼 편인데 잘 팔리긴 했을까요? 보자마자 고민 없이 불닭볶음면을 몇 봉 집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외국에 나간 한국인이기 때문에 저를 돌봐주는 내무반 병사들에게 조그만 K-선물(...)을 해 주고 싶었거든요.
"와, 코리아 카오 쏘이! 이거 정말 맛있는데!"
취사병은 아니지만 유난히 요리를 잘해 주방 담당이 됐다는 병사 L에게 끓여다 나눠 잡수시라고 불닭볶음면을 내미니 표정이 환해집니다. 그는 불닭볶음면을 '코리아 카오 쏘이 (한국 국수)'라 불렀습니다. 한 달 월급으로 800밧, 3만 원 남짓을 받는 처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 가끔 사서 끓여 먹어본 모양입니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로이따이렝에 있었던 시간 모두 샨주 남부군 병사들과 어울리며 보냈습니다. 제 또래 남성들이 으레 그렇듯 술이 들어가면 이상형 이야기가 나왔고, 유튜브로 찾아보는 웃긴 영상 취향도 동일했습니다. 잠깐 방문한 외국인을 정겹게 맞아준 로이따이렝 마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나라 산골을 찾아간 것처럼 마음이 푸근했습니다. 아침은 먹었니? 춥진 않니? 오늘은 뭐 했니? 동네 이웃들과 손짓 발짓, 그리고 서로 안 되는 태국어와 미얀마어로 소통을 하는 게 제 일상이었습니다.
한국 여성들이 피부가 참 희고 곱다며 저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본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포탄이 떨어졌는데도 북군 애들이 박격포탄을 죽어라 날리는 거야. 위로부터 명령을 받고 후퇴하는데 이미 북부동맹 애들이 우리 후방 길을 다 막고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어. 땃마도가 빌려준 포장도로로 빠르게 병력을 전개한 게 틀림없지. 돌파해 나오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제일 뿌듯한 기억이 뭐가 있냐고 물었죠? 슬픈 제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 공허한 느낌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60년을 넘게 싸웠는데, 우리 샨주 사람들은 아직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 샨주군이 우리의 목적을 아직도 달성하지 못했는데 자랑할 게 뭐가 있을까요? 샨주가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그날, 만두박사에게 제일 마음 뿌듯한 기억을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1958년, 팡롱 조약에 근거한 샨주의 분리독립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버마 중앙정부를 상대로 무력투쟁이 시작된 이래, 샨주는 아직도 전쟁 중입니다. 2012, 2015년 휴전협상에도 불구하고 샨주 남부군은 미얀마 군부를 상대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그에 더해 2015년부터는 따앙민족해방군(TNLA), UWSA, 그리고 같은 샨족 무장단체인 샨주진보당(SSPP) 등이 중심이 된 북부동맹군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양측이 서로가 미얀마 군부의 지원을 받았다고 힐난한 전쟁을 치르는 샨주 남부군 장병들은 이 상황을 한국전쟁에 빗대며 샨족 형제가 다른 샨족 형제를 죽이는 그 비극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들은 60년 간 전쟁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세대를 이어 일어난 전쟁이 샨주에 어떤 상흔을 남겼을까요?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제가 탄 오토바이를 모는 A의 부관 M에게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짜이 M, 여기 사람들한테 혁명이 끝나면 뭘 하고 싶을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안될게 어딨어? 누구든지 꿈은 하나씩 가지고 있잖아?"
로이따이렝에 도착하고 수일이 지난 언젠가, 샨주 남부군 장병들은 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을까? 란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저와 똑같이 먹고, 자고, 인스타그램을 보는 이 사람들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요? 동거 동락한 장병들에게 기회가 날 때마다 한 번씩 물어봤습니다. 평범하게 농사를 짓고 싶은 사람, 암호화폐 거래(!)에 관심이 깊은 사람,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사람...
혁명 투사 안에는 저와 똑같은 한 인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