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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박사 Jun 14. 2022

반군 본부도 사람사는 동네입니다


"오늘부터 니 이름은 삼식이여"


2일 차. 순찰 중인 군사 경찰. 조용한 산골마을 분위기지만 그래도 군사요새입니다.

도착한 첫날밤, 저를 데려다 놓은 장교 짜오 A가 고심을 거듭합니다. 이유를 물으니 왠지 곤란한 일이 생기면 대처할 수 있도록 샨족 이름을 붙여주려고 알맞은 이름을 고민 중이라고 합니다. 아마 태국 특수부대원들이 절 보면 행여나 외국인 기자가 방문했냐고 추궁할까 고민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 보석이라는 뜻을 가진 '짜이 센(Sai Hsen)'은 어떻냐 묻더니, 얼른 '에이 이건 아닌 거 같아' 하고 물려버립니다. 알고 보니 이미 동네에 그 이름을 쓰는 병사들이 많답니다.


"음...그래, 오늘부터 너는 짜이 쌈(Sai Sam)이다"

"짜이 쌈이요?"

"응. 숫자 '셋' 할 때 '쌈'. 셋째라는 뜻이야"


나중에 듣고 보니 샨주에서 많이 쓰는 아주 정겨운 이름이라고 합니다. 미스터 셋째. 한국으로 치면 '삼식이'쯤 되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삼 남매 중 제가 막내여서 아주 좋은 이름이라 여겼습니다. 


도착한 첫날에 이름을 얻어 둘째 날부터 짜이 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돌아다녔습니다. 샨주 남부군 장병들은 물론이고 마을 주민분들이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외국인이 '삼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니 정겨우셨던 것 같습니다. 매일 '마이숭 카 짜이 쌈! (좋은 하루예요, 삼식 씨!)' 불러주는 이웃 주민분들께 인사하고 서로 안 되는 미얀마어, 태국어, 그리고 제가 매일마다 새로이 배웠던 어설픈 샨어를 섞어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게 하루 중요한 일과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알게 되었습니다만, 발음을 자칫 잘못하면 숫자 셋("쌈")이 아니라 성관계를 아주 속되게 부르는 단어("삼")가 된다고 합니다. 그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저를 소개할 때 잠깐 당황하셨던 몇몇 분들의 얼굴이 떠올려집니다. 


아마 그날 제 발음이 유난히 좀 샜었나 봅니다. 




아저씨는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오늘의 식사 담당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열악한 환경인데 주방이 퍽 위생적이고 깔끔합니다.


저녁시간이 되자 식사 당번 병사들이 분주하게 반찬이 담긴 접시와 쌀밥 냄비를 옮깁니다. 조촐하지만 그래도 고기반찬이 꼭 한 접시는 올라간 게 인상적입니다. "다른 여단 애들은 일주일에 고기 한두 번 먹으면 잘 먹은 셈인데, 우리 애들은 일주일에 너 다섯 번은 고기를 먹지 뭐야. 식비 때문에 죽을 맛이야!" A가 넌지시 자기 부서 자랑을 합니다. 병사의 전투력은 고기, 술, 그리고 "삼"(...)으로 유지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그는 휘하 장병들에게 소개팅(!)을 주선하고 고기를 최대한 많이 배식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들 군대 와서 가족이랑 멀리 떨어져 있잖아. 장교들이 챙겨야지." 함께 있는 동안 그가 말버릇처럼 되뇐 말입니다. 샨주 남부군은 남성의 경우 5년, 여성은 3년의 의무복무를 헌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엔 3년이라 들었는데, 그새 늘어난 것 같습니다. 지도부로부터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하는 친지 방문, 또는 결혼을 위한 귀향휴가를 제외하면 딱히 정기휴가도 없습니다. 길고도 깁니다.


A의 신념 덕에 그런지, 로이따이렝 안에서 A네 부서는 마치 동네 사랑방과 같았습니다. 그의 부서가 부식 예산에 관대한 데다, 소속 장교들이 아주 친절하고 장난기가 많은 편이라 친구들이 굉장히 많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일정이 없는 날 가만히 내무실 주변에 앉아 있으면 행여나 과자가 있을까 기웃거리는 동네 꼬마들이며, 수다 떨러 오는 노병들과 이웃 아주머니들, 그리고 최전방에서 살아 돌아온 장병들이 후방근무를 하는 친구들을 찾아 술이며 간식을 들고 끊임없이 방문했습니다.


아빠 일터 따라 나와 과자 까먹는 애기들. 제 방문 시기가 방학기간이었어서 아이들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그들이 그저께 갓 들어온 신입(?)에게 가장 궁금한 게 뭐가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제게 한국 여성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던졌습니다. 워낙 많이들 물어보셔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일례로 "짜이 쌈, 한국 여자들이 그렇게 피부가 희다는데, 사실이냐?"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네가 한때 그랬듯, 샨족 사람들도 흰 피부에 대한 동경이 큰 편입니다. '시꺼먼 나를 봐도 알 수 있듯 모두가 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살결이 흰 사람이 많긴 하다'라고 설명해주니 남정네들 눈빛이 호기심에서 부러움으로 바뀝니다(...) 정말 좋은가 봅니다.


반면 저도 궁금해 물어봤습니다.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병사들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오릅니다. 연예인들 이름 좀 나올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구체적인 이상형이 튀어나옵니다. 일찍 결혼한 병사 하나는 옆에 앉은 아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으로 아내를 가리킵니다. 다른 한 병사는 아주 솔직하게 "나는 키가 나보다 살짝 작고 피부가 밝았으면 좋겠어" 고백합니다. 그걸 본 다른 병사 하나가 아주 의젓하게 미소를 띠며 말합니다: "나는 외모는 상관없어. 그저 마음씨가 곱고 대화가 잘 통했으면 좋겠어"


"아알-로! (아이고!)" 그 얘기를 들은 한 장교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피식 웃습니다. 


나중 가서 보니 외모는 상관없다는 병사가 동네에서 누가누가 예쁜지 굉장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걸으며 가게라도 하나 지날라 치면 불쑥 "저 집 딸이 아주 예뻐요" 하면서.





휴대폰 신호를 찾아, 푸르른 목초지를 찾아 떠나는 양떼들처럼.


로이따이렝의 통금은 저녁 10시부터 오전 5시. 10시가 되면 동네를 순찰하는 군사 경찰의 호루라기가 울리고, 모르긴 몰라도 "얼른 귀가하세요!" 라고 말하는 게 틀림없는 외침이 한참 들립니다. 그런 후, 동네 전체에 고요한 적막이 흐릅니다. 영어권에서 유학해 영어가 유난히 유창했던 한 장교가 설명하길, 열 시 즈음되면 동네가 모두 잠자리에 든다고 합니다.


처음엔 '와 그래도 군사정부라 통제가 엄격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지낸 부서는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모여서 술 한잔 더 하거나 하며 통금 시간을 훌쩍 넘겨서 잠자리에 드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었습니다. 


늦어도 저녁 9시가 되면 태국발 휴대전화 신호가 아예 끊기더라고요. 해가 지면 할 일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녁식사 후 몇몇 어린 주민들과 장병들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는 유목민들처럼 언덕 위를 향하지 않으면, 태국 국경 안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데이터가 안 잡혀 신호가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죠. 부서에서 제일 어린 병사도 모바일 롤을 열심히 하다 랙이 심하다고 툴툴거리며 저어기 태국 국경 너머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모두 로이따이렝 안입니다)


"예전엔 휴대폰 신호가 딱 여기만 잡혔었어." 언젠가 한 언덕을 오르다 장교 하나가 말했습니다. 


"그때는 일과시간 끝나면 동네 사람들 다 여기 쭈그려 앉아 있었는데." 


지만 그것도 찰나의 순간. 저녁 9시가 지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데이터가 툭 끊기고, 다음날 아침 7시까지 바깥세상과 통신이 두절됩니다. 물론 그나마도 AIS, TRUE 심카드 사용자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태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 (산간지역에선 신호가 유난히 약한 편인) DTAC 심카드를 쓰던 연락장교 B는 낮에 구름만 조금 껴도 폰이 먹통이 되는 바람에 매일 눈물을 머금었습니다.


여기 빼고. 아마 프리덤 타워라 불렀던 것 같은데, 이 통신탑 근처는  데이터가 하루 24시간 콸콸 쏟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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