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마을이자 혁명의 중심지, 메솟의 이야기
'쿠웅- 쿠웅- 쿠웅-'
커피를 너무 마셔댔는지 잠 못 드는 어느 늦은 밤, 메솟 서변 멀리서 또다시 폭죽소리와 같은 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옵니다. 새해도 지났고, 음력 설도 한참 남은 날, 그것도 늦은 새벽에 무슨 폭죽이 터질까요?
저처럼 다들 밤올빼미 생활을 하며 밤늦게까지 시끌시끌 정겨운 미얀마 이웃들이 숨을 죽인 듯 조용해집니다. 저 또한 숨죽여 멀리서 들리는 폭죽소리에 집중했습니다. '폭죽소리'는 10여분 동안 계속된 후 멈췄습니다.
"선생님, 왜 있잖아요, 그 저녁 늦게 폭죽소리처럼 들리는 거... 그거... 포격 맞지요?"
어느 날 인터뷰 좀 잡아달라고 간곡히 조르기 위해 만난 카렌민족해방군 장교 C에게 물었습니다.
"어, 포격. 버마 땃마도 120 밀리미터, 그리고 122밀리미터 [포]. 전선이 메솟에서 굉장히 가까워"
그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스마트폰 전화번호부를 밀어 올리며 무심코 답했습니다. 혁명전사가 된 지 30년이 좀 안된 그에게 포격소리는 그저 휴전으로 잠시 멈추었던 일상의 회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매홍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미얀마 국경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메솟에 있습니다. 주된 목적은 이곳에 연락소를 차린 카렌민족해방군과의 접촉입니다. 아마 한번 더 와야 할 것 같습니다만, 계획상 태국 현장연구의 마지막 장소입니다.
겉만 보면 그저 미얀마 사람들과 태국인이 어울려 사는 국경도시이지만, 그 겉을 파고 속을 살펴보면 매홍손, 치앙마이와는 조금 달리 미얀마 내 시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게 느껴집니다.
돈보단 시간이 좀 더 아까워 탄 비행기에서 내려 메솟 공항에 도착하니 경찰들이 비 태국인 모두의 행선지와 숙소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최근 문제가 된 국경 카지노 안에서 일어나는 인신매매와 마약밀수 등 불법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선 노릇을 하는 모에이 강변 곳곳에 카지노에서 일하는 것은 "생명과 인생의 낭비"라며 불법 월경을 금지하는 팻말, 그리고 왠지 모르게 괜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사진촬영을 엄금한다는 팻말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격화된 미얀마의 내전을 증명하듯, 태국 국경 수비대 중에서도 기동타격과 국경지대 무장 정찰이 주 업무인 타한 프란, 이른바 '흑색 전사'들이 강변에 심심찮게 보입니다. 시내를 순찰하는 태국 경찰들도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방검복을 착용하는 등 좀 더 위협적인 옷매무새를 하고 있습니다.
고압적인 자세로 길거리 곳곳에서 미얀마 청년들의 여권을 검사하고 심문하는 그들을 보면 흡사 스타워즈 타투인 행성의 제국군 스톰트루퍼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분위기의 이유를 증명하듯 메솟에도 새로운 얼굴들이 다시금 도착했다고 합니다. 본래 미얀마로 들어가는 구호단체와 자유언론사들의 본거지 역할을 하던 메솟은 2010년 이후 다시금 한적해졌습니다. 미얀마에 명목상 민주주의인 친군부 정권이 들어서며 국제사회가 미얀마 밖에서 활동을 하는 NGO들에게 지원을 끊은 것이 제일 큰 이유였습니다. 또, 친군부 정부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대사면을 약속하자 고향이 그리웠던 미얀마 운동가들이 귀국을 하기도 했고요.
2021년 미얀마 쿠데타가 이런 메솟을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렸습니다. 미얀마 운동가들이 떠난 후 퍽 한적했었던 메솟 길거리엔 이제 화면 큰 스마트폰과 교보재를 한 아름 안고 다니는 호리호리한, 양곤 번화가에서나 볼법한 옷차림을 한 미얀마 젊은이들이 퍽 많이 보입니다. 늦은 오후 찻집에 삼삼오오 모여 차와 주스를 마시는 그 친구들을 보면 저 또한 태국 시골이 아닌 양곤에 온 듯 기분이 묘합니다.
"여기서 사는 게 쉽진 않아" 그곳에서 만난 양곤에서 온 여학생 하나가 제게 말했습니다.
음악공부를 하다 졸지에 난민이 됐다는, 양곤에선 한국 음악과 드라마를 아주 자주 접했다는 그 친구는 쿠데타 정국 이후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도강을 택했습니다. 그의 속마음엔 군사정부에 대한 반감만큼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제게 메솟에 사는 태국인들이나, 이곳에 오래 거주한 미얀마인들이나 그들을 딱히 반기진 않는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이유를 듣자 하니, 그저 '어린 친구들이 너무 나댄다(...)'는게 그 이유랍니다. 혁명만을 바라보며 민주화 운동에 매진했던 옛 8888세대와는 달리 그들은 필요한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때 그분들은 메솟에선 숨어 살기만 했었대." 어느 어린 인권운동가가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른들과는 많이 다르잖아? 항상 밖에 돌아다니고, 시끌벅적하고. 종종 여행도 가야 하고. 어떻게 사람이 집안에만 있을 수 있겠어!"
해맑게 웃으며 신세대와 구세대 운동가들을 비교해 주기도 하고, 자기가 방문한 메솟 근교 핫플레이스도 추천해 준 그는 이제 갓 20대 초반이 됐을까요? 제가 토론토에서 가르치던 학부 친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친구였습니다.
"형은 어디서 왔어?"
저녁식사 후 메솟 길거리를 방황하다 우연히 들린 어느 날 저녁, 술집에서 서빙을 하던 형에게 물었습니다. 강 건너 전황이 급박한 탓인지 연구활동이 지지부진해 미얀마에서 건너온 청년들과 더 말을 붙여볼 심산이었습니다.
"바고에서 왔어. 군부 때문에 여기 왔어." 제가 주문한 칵테일 재료를 주섬주섬 꺼내며 그가 답했습니다.
"아하, 나는 양곤 산챠웅 [%%%]에서 좀 있었는데"
"아아 산챠웅 사람이야? 나도 거기 살았어요. 그 왜, [&&&] 알아? 나 거기서 일했었어."
세상 참 좁습니다. 저 양곤 살던 시절 이웃주민이었습니다. 그것도 유난히 와이파이가 좋아 제가 자주 드나들던 곳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동년배입니다.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그에게 제 현장연구 명함을 건네주었습니다. 제 명함을 읽은 그는 칵테일을 말다가 멈칫 생각하곤 제게 웃으며 얘기해 줍니다.
"나 양곤에서 나와서 지금은 카렌민족해방군 병사야. KNDO."
제 동그래진 눈과 '아하...' 하는 표정을 본 그는 얼른 칵테일을 내주곤 지갑에서 주섬주섬 자기 카렌민족해방군 신분증, 그리고 폰을 꺼내 페이스북을 열어 그의 정글 사진과 영상들을 보여줬습니다. 손엔 자동소총을, 허리춤엔 탄창을 주렁주렁 매단 그의 모습엔 양곤 힙스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정글 전사의 모습만 확연합니다. 저도 질세라 샨주 남부군, 카레니민족진보당과 함께 지냈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잠깐 해줬습니다.
마치 '얘도 우리 과구나' 생각한 듯, 그의 표정이 활짝 핍니다.
서로의 정체가 탄로(?) 난 김에 그는 같이 일하는 직원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을 해 줬습니다. 술집 구석에 앉은 안경을 쓴 왜소한 체격의 친구는 의대 나온 의무병입니다. 열심히 안주를 나르던 다른 친구는 같은 중대원. 그는 백여 명의 대원을 거느린 그들의 중대장입니다. 술집 전체가 전선에서 생사를 오락가락한 전우들이었습니다.
미얀마 군부와의 전투에서 그렇게 이기진 못하고 있다며 민망하게 웃은 그는 무기값을 벌고, 그 돈으로 재보급을 추진하기 위해 메솟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태국 경찰이 딴죽을 걸진 않아?" 제가 물었습니다.
"그런 일 거의 없어. 행여나 그런 일이 있으면 내 신분증을 꺼내 보내주면 돼."
카렌민족해방군 소속인 그는 다른 미얀마 난민들과 달리 경찰들과 아주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7년 창설한 카렌민족연합(KNU), 그리고 KNU의 군대인 카렌민족해방군은 메솟을 후방 보급기지로 삼은 지 이제 수십 년이 넘어가는 단체입니다. 그런 만큼 태국 경찰들이 그들을 엄히 대하는 게 쉽진 않은 것 같습니다.
딱 한잔만 하고 들어가려던 제 계획은 멀리 던져두고 그와 한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서로의 여자친구 사진을 돌려보기도 하고, 요즘 탄환 시세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는 중에도 그는 전선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그의 여자친구도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했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도피 중인 그의 여자친구에게 으레 영상통화를 걸어 '한국인을 만났어! 버마어도 좀 해!' 하며 자랑을 합니다.
그의 요즘 바람은 얼른 필요한 무기를 확보해 다시 최전방으로 돌아가는 거랍니다. 전선에서 고생하는 형제들과 함께 하고 싶다면서요. 참 용감한 사람이다, 싶다가도 몇 년 전엔 같은 장소에서 커피를 마시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을 평범한 청년이 전혀 평범하지 않은 길에 뛰어들었을까- 하며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는 이제 메솟을 떠나 모에이 강을 건넜습니다. '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겠다면서요. 나중에 메솟에 남은 직원들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전선으로 갔다고 합니다. 누가 들을까 걱정돼 말없이 검지 손가락을 당기는 시늉을 해 보였습니다. 그들도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끄덕입니다.
제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생각만 많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