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두박사 Jul 24. 2023

카렌족의 잿빛 혁명 -1-

열성적인 혁명은 어디던 분열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아래 내용은 2023년 태국-미얀마 국경에서 청취된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됐습니다 **


저는 매솟에 있습니다. 오늘도 매솟 서변 국경 넘어에서는 포성소리가 간간이 들립니다. 강 건너 먀와디 근교의 저항군 고지가 120 미리 박격포 포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이곳은 미얀마 반군부 저항세력이 집결한 곳이자,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모여든 친군부와 군부를 지탱하는 세계 여러 세력들의 각축장이자, 그 혼란상을 이용해 한탕 크게 벌어보려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동기를 가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만큼 이곳은 탁한 잿빛입니다. 흑도, 백도 아닌, 회색 그 어딘가.


매솟에서 만난 한 친구는 "겉으로 보면 흑과 백으로 선명하게 나뉘는 일도 그 속을 깊게 들여다보면 흑과 백이 아닌, 온통 회색이었다" 고 말했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으로 보였던 것이 훨씬 더 짙은 회색인건 확실하지만-" 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곳에서 70년 넘게 미얀마 군부와 싸워온 카렌민족연합, 그리고 카렌민족의 군대의 카렌민족해방군 또한 흑도 백도 아닌 회색 그 어딘가를 맴돌았습니다. 누구에게는 카렌민족의 혁명을 배반한 사람들, 또 다른 누구에게는 고난을 이겨내 새로운 혁명의 동력을 보존해 온 사람들.


이번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카렌민족연합의 기원...


카렌민족해방군(KNLA)은 1949년 봉기한 카렌민족연합(KNU)에 소속된 무장단체입니다. 2차 대전 이후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던 때, 영국령 버마 안에서 카렌족을 대표한 KNU는 카렌의 분리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카렌족은 버마의 직접통치안에 들었던 적이 없었고, 영국령 버마 또한 카렌족을 버마 직할지 (Ministerial Burma)와 따로 분리된 자치구역으로 봤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현재 양곤을 포함한 에야와디 삼각주와 카렌주를 커뚜레이 (Kawthoolei), 즉 카렌 민족국가의 영토로 보았습니다.


이 요청은 영국정부에 의해 무시당했고, (비록 카렌족이 참석하진 않았지만) 버마 내 소수민족의 자치와 분리 권한을 약속한 아웅 산 장군 또한 암살당했습니다. 그리고 카렌민족연합을 위시한 카렌족은 버마 정부의 탄압시도에 맞서 전국적인 봉기를 거행했습니다. 당시 양곤 근교 인세인에서 수개월 간 격전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미얀마 중동부, 남부, 그리고 카렌족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했던 바고 산맥 근처, 그리고 카렌주를 휩쓸었습니다.

KNU가 주장한 커뚜레이의 영역. 그들을 이념상 카렌 민족국가 설립을 주장했지만, 영역 내 여러 민족이 더불어 사는 현실을 고려해 평등한 다민족 국가를 표방했었습니다.


KNU는 봉기 당시 지도자였던 쏘 바우 지 (Saw Ba U Gyi)가 정립한 원칙을 그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1) 기필코 항복은 없다

2) 카렌 민족국가의 수립과 국제적 인정을 기필코 관철시킨다

3) 우리는 무기를 버리지 않는다

4) 우리의 정치적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KNU의 이념적 지주였던 쏘 바우 지. 사실 말끔한 미남인데...^^; 그래도 카렌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진으로 골랐습니다.

쏘 바우 지는 1950년 8월 12일, 버마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떠난 길에서 버마군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습니다만, KNU는 또 다른 지도자, 만 바잔 (Mahn Ba Zan)을 중심으로 뭉쳐 에야와디 삼각주, 그리고 현 카렌주인 '동부 카렌'을 중심으로 저항을 이어나갔습니다. 


만 바잔이 이끈 에야와디 삼각주의 KNU는 버마공산당과 합작해 좌파 색이 짙었고, 동부 카렌은 태국에 인접해 친서방 (또는 반공) 색채가 강했습니다. 이는 동서부 전선의 현실적 고려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서부 에야와디 삼각주는 카렌민족해방군만큼이나 세가 컸던 버마공산당과의 합작으로 공공의 적이었던 버마 중앙정부와 대항하려 했고, 동부 전선은 태국 국경에 인접한 만큼 반공이념을 내세운 서방의 지원을 꾀했었거든요.


안타깝게도 이런 이념적 균열(?) 덕에 봉기 초기 KNU는 좌파 공산세력이 아니냐는 눈초리를 짙게 받았었습니다. KNU의 정신적 지주이자 실제 지도자 역할을 했던 만 바잔은 민족해방 단체였던 KNU를 사상적으로 정립하는데 사회주의적 이론을 크게 참고했었거든요. 그게 원인이 되어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커뚜레이의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태국을 통한 서방으로부터 지지를 구했던 헌터 탐웨(Saw Hunter Thamwe)는 "공산세력과는 손잡을 수 없다"는 조롱 섞인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게 이유였을까요? 현실의 벽을 절감한 헌터 탐웨는 결국 본인을 지지하는 소수의 세력을 데리고 1963년 버마 군부에 항복했습니다.


이 두 지역 간의 불협화음은 70년대 에야와디 삼각지의 카렌민족해방군이 버마 군부에 의해 축출돼 동부 전선인 카렌주의 저항을 지휘한 보 먀(Bo Mya)의 통제하에 들어가며 정리됐습니다. 보 먀는 에야외디 삼각주에서 생환한 친 좌파 KNU 회원들이 에야와디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친서방 반공 노선을 확실히 탄 동부 KNU의 지휘 아래로 확실히 들어오던지 양자택일을 하도록 강요했고, 카렌민족의 통합을 간절히 소망했던 만 바잔이 보 먀의 요구를 수용해 KNU의 공동지도자로 나섰습니다. 물론 명목상의 공동지도체제였고, 실권은 보 먀가 쥐었다고는 합니다만.


현재 우리가 일컫는 카렌민족해방군의 해방구 '커뚜레이'는 이렇게 완성됐습니다.


물론 해방구도 어쩔 수 없는 관료사회라... 식목일이라 모든 커뚜레이 공무원들이 나무 심기에 바쁜 가운데, 츄리닝 차림의 전사가 왠지 총을 들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ㅎ_ㅎ




... 그리고 분열


그렇게 잘 화합해 단결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 안타깝게도 삼각주에서 온 사람들과 고지대에서 살던 사람들 사이엔 혁명이라는 끈끈한 소속감만큼이나 큰 균열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주로 써우(S'gaw) 카렌말을 쓰는 삼각주, 그리고 양곤 근접에서 온 카렌족 사람들은 한때는 영국식 교육, 그리고 그 이후엔 고등교육과 도시문화를 누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들은 자연스레 카렌민족 혁명의 중심이 됐습니다. 절박할 정도로 인력자원이 부족한 게릴라 전선 속에서 외부세계와 소통하기 위한 유창한 영어와 그들의 높은 학력은 권력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KNU가 실제로 자리한 고산지대의 카렌족 사람들은 영어나 고등교육을 쉽사리 접하지 못한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불교와 정령신앙을 주로 믿고, 프워(Pwo) 카렌어의 여러 분류를 모어로 삼은 그들은 주로 도시에서 온 카렌족들 아래에서 일반 사병, 또는 하급지휘관으로 혁명에 가담했습니다. 권력에 밀려난 그들은 자연스레 혁명의 최전선, 그리고 권력의 변두리에서 제일 큰 고생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완이화 양이 아마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프워 카렌 화자일겁니다/Naw Martha Htoowah Facebook


그리고 써우 카렌어 화자들이 프워 카렌 화자들이 가진 불만에 대한 안일함은 결국 카렌민족해방군의 분열의 씨앗이 됐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당시 카렌 주 안에서 '먀잉지누의 현자(မြိုင်းကြီးငူ ဆရာတော်)'라 불리며 큰 존경을 받던 승려 우 뚜자나(ဦး သုဇန; U Thuzana)는 90년대에 카렌주 내 불당건립을 독려하는 등 불교 진흥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때 KNU 소속으로 활동했었던 그는 카렌민족해방군의 본부인 마너쁠로(Manerplaw)에 불당을 건립하려 했습니다만, 보 먀의 제지로 불당 건립에 실패했습니다. 본부 안에 하얗게 칠한 불탑이 세워지면 본부 전체가 미얀마 군부 전투기에 너무 쉽게 노출된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우 뚜자나는 그 길로 카렌민족해방군의 해산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우 뚜자나를 추종하는 비 기독교 카렌민족해방군 대원들이 그를 따라 민주카렌불교군(Democratic Karen Buddhist Army; DKBA)*를 자처하며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그 길로 미얀마 군부와 동맹을 맺어 카렌민족해방군과 교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 12월의 일입니다.


*DKBA는 2009년에 미얀마 군부의 연락장교와 부사관이 편제된 국경수비대 (Border Guard Force; BGF)로 재편됐기도 하고, 국경수비대화에 반발한 DKBA 5 연대가 KNU와 연대한 민주카렌자애군(Democratic Karen Benevolent Army; DKBA-5)라는 동일한 약칭(!)의 단체로 떨어져 나가 현지에서는 흔히 카렌 국경수비대 (Karen BGF)라고 흔히 불립니다. 헷갈리죠? 미얀마 사람들도 그렇대요(...)


카렌민족해방군 사이에서도 이 분열의 원인에 대한 이견이 분분합니다. 한편으로는 미얀마 군부의 분열홱책 전략이 먹혀든 것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 주장합니다. 우 뚜자나가 불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얀마 군부에 의해 포섭된 정황이 존재하고, 그렇게 포섭된 그의 이른바 '배반'이 분열의 원인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종교도 종교지만, 카렌 민족에 대한 큰 배반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감정이 간간이 보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카렌족 기독교도들이 선을 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마너쁠로 안에 불당을 건설하지 못하게 된 건 그저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고, 기독교도들이 주류였던 카렌민족해방군 지도자들이 불교와 정령신앙이 주류였던 일반 병사들과 하급 지휘관들을 하대하며, 그들의 불만을 묵살해 버린 것이 분열의 원인이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때 그 시절, 전선에서 한 발짝 떨어진 태국 매솟에서 편안하게 사무실을 차리고 집을 지어 거주한 카렌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신실한 재림교회 기독교인이었던 보 먀 또한 지도부 전체를 기독교도로 채워 넣는 일을 벌이기도 했었거든요.


2013년 경, 5 연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카렌민족해방군 전사들/The Norwegian Ministry of Foreign Affairs


두 동강 난 카렌 혁명, 그리고 휴전 전야


그 이유야 어떻든 카렌족의 혁명은 그들 사이의 분열로 인해 두 동강이 났습니다. 1995년 1월, DKBA가 길잡이로 나선 미얀마 군부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카렌민족해방군은 혁명본부 마너쁠로를 소개, 불질렀습니다. 그 난리통에 마너쁠로에 비축된 카렌민족해방군의 무기고 또한 모에이 강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적에게 무기를 뺏기느니 강에 던져버리겠다는 현장 판단이었다고 합니다.


마너쁠로 함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먀와디 근처에 위치했던 난공불락의 카렌민족해방군 요새 꺼우무라 (Kawmoora) 또한 버마 군부에 의해 함락당했습니다. 꺼우무라 방어를 맡은 카렌민족해방군의 정예 전략예비대인 101 대대는 두 달간의 격전과 매일같이 비처럼 내리는 포탄을 견디지 못하고 꺼우무라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버마 군부와 전선을 유지하며 싸울 정도로, 전사들끼리 "적이 한 발을 쏘면 우리가 열 발은 쏴 제껴야 그날 점심 맛이 좋다"고 농담했다던 당당한 위세의 카렌민족해방군은 1995년 초에 사라졌습니다. 그들 자체 추산으로도 기존 병력의 3/4가 그 해 흩어졌다고 할 정도니, 실제 피해는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살아남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난민으로 태국 국경이며 미국, 캐나다행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DKBA 혹은 KNU에서 분열돼 떨어진 또 다른 점조직 반군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그 이유로 많은 카렌족 사람들에게 1995년은 가슴에 사무치는 해로 남아있었습니다. 저와 인터뷰하던 몇몇은 마너쁠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고, 또 다른 몇몇은 목이 메어 잠시 말을 가다듬기도 했습니다. 그들 모두 그때 꺼우무라에서, 마너쁠로에서, 그리고 커뚜레이의 이름 모를 산이며 정글에서 한 끝 차이로 죽음과 죽음 사이를 가까스로 비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너쁠로 함락 이후 우린 많은 걸 잃었어." 한 카렌민족해방군 장교가 제게 말했었습니다. 


"DKBA의 배신 이후 우리는 항상 짐승처럼 쫓겨 다녔어. 우리 모든 샛길과 고지를 꿰고 있는 적을 상대로 각개로 포위된 채 싸웠거든. 우리를 지지해 주던 카렌 마을들도 결국 버마인들의 심리전과 폭력에 넘어가버렸고..."


현재, 꺼우무라 전경. 95년 전투 당시 태국군이 모에이 강변에 세운 토벽 위에서. 한때 완카 지역을 감제하고, 국경무역 관문 노릇을 했던 강변 요새는 이제 잡초로 뒤덮였습니다.


"그 이후로 전선이 어딨어, 그땐 그냥 게릴라였어." 마너쁠로 함락 이후 한동안 최전선에서 소부대를 이끌었던 다른 카렌민족해방군 장교도 제게 말했었습니다. 


"그냥 매복했다가 뻥! 따다다닥! 쏘고 튀는 거야. 예전같이 맞서 싸울 수가 없었으니까. 마너쁠로 함락 후 적어도 한두 해는 총알이 부족해 전전긍긍했었어." 


그때 그 시절의 여파는 아직도 카렌민족연합군과 그 휘하 인민방위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시 카렌 주 전선으로 돌아간 미얀마 인민방위대 친구도 현재도 매일매일 M16 탄창 여러 개를 몸에 두르고 싸움에 나설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조심스레 얘기해 줬습니다.


더 이상 싸울 수 있을지 카렌족 전사들끼리 서로 묻던 절박한 상황 속에서 KNU 지도자 일부분은 2012년에 최고지도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미얀마 군부와 휴전협정을 맺게 됩니다. 서로가 현실감각을 잃었다, 혁명을 배신했다 손가락질을 하는 그들은 어떤 이유로 대립하는 걸까요? 





1995년 이후 카렌민족해방군의 잿빛 혁명은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임아, 모에이 강을 건너지 마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