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논문 다 쓴 썰 푼다 ㅋㅋ
('만두박사, 박사 후보가 되다', 그리고 '현장연구의 끝에서' 에서 이어집니다)
2025년 여름, 저는 지금 토론토에 있습니다.
5년간 보장된 학교 지원금을 모두 소진해 정부 장학금과 시간강사 급여로 버티는 박사과정의 끝자락, 그 과정의 꽃은 단연 박사논문일 것입니다.
이제 그 끝이 보이는 오늘에 이르러 박사논문에 대한 소회를 모아봤습니다.
사회과학 분야의 박사논문은 보통 연관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해 쓴 소논문 세 개를 엮은 이른바 '3 페이퍼 박사논문 (three paper dissertation),' 또는 하나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연구 결과물과 그 의의를 여러 개의 챕터를 통해 풀어낸 이른바 '책 박사논문 (book dissertation)' 으로 갈린답니다.
이 두 개의 형식 중 어떤 박사논문을 쓰게 되는지는 학교의 요구사항과, 논문을 쓰는 박사생 (그리고 지도교수)의 판단에 달려있습니다. 가령 3 페이퍼 형식의 박사논문은 비교적 속도감 있게 학위청구를 위한 논문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 만든 논문을 빠르게 3개의 학술지로 출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연구가 냉큼 출간하지 않으면 속히 사라져야 하는 요즘 학계의 니즈에 더 잘 부합합니다.
그에 비해 책 형식의 박사논문은 학술지 출간을 위해서는 박사논문을 좀 창의적으로 편집하고 뜯어 붙여야 한다는 (...) 부담감이 있습니다. 연구 데이터와 분석결과를 기술 있게 뜯지 않으면 학술지가 3개는커녕, 하나도 겨우 나오게 됩니다 (물론 박사논문을 통째로 요약한 하나만 제대로 나와도 이걸 '잡 마켓 페이퍼'라 부르며, 종종 한 학자를 수십 년 간 대표할 학술지가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박사논문이 이미 책 형식으로 짜여 있어 졸업 후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책 한 권을 출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학술지 출간에는 좀 불리하지만, 북미와 유럽 학계에서 정년보장을 위한 최소 심사조건으로 내거는 학술서적 출간에는 더 유리한 셈이지요.
두 형식의 박사논문은 서로 장단점이 갈리기 때문에 박사생 개인의 니즈와 취향, 그리고 지도교수님의 의중을 잘 살펴서 결정하는 게 좋습니다. 사실 책 형식의 박사논문이 아직도 주류이긴 합니다만, 요즘은 박사후보들도 졸업 전 학술지를 여럿 출간해야 한다는 압력에 3 페이퍼 논문의 빈도가 전보다 잦아졌습니다. 저와 제일 친한 박사 동기들 중 한 명도 3 페이퍼 논문을 쓰고 취업했습니다.
다만 저는 책 형식의 논문을 쓰는 만큼, 책 논문에 중점을 두고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책을 쓰는 건 학술지를 쓰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학술지는 연구의 핵심을 요약해 도파민 파티 연구결과와 그 의의를 정확하고 간결하게 던져야 합니다. 비비 꼬면 외면받습니다 (밥 먹고 학술지 읽는 게 본업인 저부터도 그런 글은 안 봅니다). 그와 반대로 책은 정확하고 간결하기만 하면 내용이 얕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입니다. 책의 가치는 연구 프로젝트의 필요성과 그 내용, 그리고 결과물에 대한 의의를 더 자세하고 깊이 있게 서술하는 데 있습니다. 어쩌면 유튜브 영상과 틱톡 쇼츠 정도의 차이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 책 형식의 박사논문은 굉장히 깁니다. 타 사회과학, 인문학의 경우 좀 더 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정치학의 경우 보통 6만-8만 단어 남짓입니다. 가끔 700페이지가 넘는 성경급(...)의 논문도 나올 때가 있지만 솔직히 흔치 않습니다.* 책과 논문은 보통 과거에 비해 더 간략해지는 트렌드랍니다. 저 저뿐만 아니라 제 주변을 둘러봐도 보통 200-250페이지 내외의 논문을 제출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학교와 학과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렇게 길게 쓰면 어쩌면 문제가 되겠다 싶은 것이... 토론토 대학교를 포함한 영연방권 대학교들은 논문심사 때 내부 심사인 (Internal examiner)과 외부 심사인 (External examiner)이 논문심사위원회와 함께 디펜스를 봅니다. 디펜스 전에 차례대로 제출한 박사논문을 읽게 되는데, 내부 심사인은 보통 2주, 외부 심사인은 최장 6주 내로 논문을 읽어서 합, 불합 의견을 내야 합니다.
2주는커녕, 6주 내로도 700페이지는 빡세다 싶습니다(...)
박사논문은 다르게 불러 "Writeup (보고서)"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보통 박사논문 프로젝트를 굴리기 위한 장학금이나 연구비 심사를 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논문은 그동안의 연구활동을 통해 수집한 데이터를 정리, 분석해 그 결과를 체계적으로 발표하는 글이라는 의미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에 먼저 데이터를 나열해 비교, 분석하고 제 연구 프로젝트가 묻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사실 글 쓰는 시간보다 이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기도 합니다. 저 경우 논문이 완전히 완성되기까지 걸린 글쓰기 시간은 7-8개월 남짓이지만, 데이터 분석 + 고민작업은 적어도 1-2년은 걸린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고민이 너무 길어지면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인생은 짧고, 장학금과 연구비도 필연적으로 잘리게 됩니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단, 무조건, 써야 합니다. 상술한 고민작업이 귀중할지언정 그 결과물을 얼른 쓰지 않으면 동기들이나 지도교수님께 "나 이만큼 했어요~" 하고 보여드릴 게 없습니다. 웬만하면 계속 글의 뼈대를 맞추고 문단을 쓰는 작업을 매일 같이 이으며 멈춤이 없게 하되, 영 아니다 싶으면 하루 100 단어라도 쓰겠다고 컴퓨터 앞에 잠깐이나마 앉는 게 중요합니다. 일단 앉으면 뭐라도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쓰는 것에 매몰되어 정기적인 리뷰 세션과 학회 발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제 지도교수님은 너무 자주 중간결과물을 공유하는 건 시간낭비라 여기셨지만, 그럼에도 불구 6개월 동안 잠수 탔다가 뿅 나타나 "박사논문 다 썼어요" 하며 수백 페이지 문서파일을 아무런 언질 없이 보내는 모양새도 극히 경계하셨습니다. 보일 게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고, 코칭을 받지 않은 글은 자칫 말도 안 되는 수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고로, 논문을 성실히 쓰기도 잘 쓰되 중간중간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주기적으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론 챕터, 그리고 사례 두 개를 분석한 챕터 두 개가 완성된 즉시 지도교수님과 논문심사 커미티에게 보이고, 개선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찬찬히 읽고 코멘트를 남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게는 몇 주, 정말 길게는 한두 달이 걸리기 때문에 시간을 미리 잘 계산해 보내는 게 좋습니다.
학회활동도 형편과 시간이 닿는 대로 매년 최소 한 번씩은 하며 네트워킹을 시도하는 게 이상적입니다. 보통 큰 종합학회 한두 곳을 중심으로 내 지역, 또는 내 전문분야에 특화된 중소규모 학회에 발표를 하는 것 같습니다. 동남아를 주로 연구하는 정치학자인 제 경우 전자는 APSA (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와 ISA(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였고, 후자의 경우 CCSEAS(Canadian Council for Southeast Asia Studies), Burma Studies Conference, 또는 SEAREG (Southeast Asia Research Group) 였습니다.
글은 참 간결하게 썼지만...^^; 매일 앉아서 어떻게든 글을 쓰고, 쓰지 못하고 워드파일만 스크롤링하며 시간을 때우고, 이것도 아닌가 하며 쓰고 지우고, 파일을 삭제했다 말았다 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글의 내용이 떠올라 해 뜰 때까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과정은 말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혹시 지금 박사논문을 쓰고 계신 분이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진심을 담은 위로와 응원을 전합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자기만의 페이스를 찾아 잘 버티고 넘기셔야 합니다. 지금도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커미티 교수님들과 계속 원고를 보내드리고 코멘트를 받으며 논문의 챕터를 하나씩 쓰고, 다듬다 보면 언젠가, 기필코, "오 ㅋ 이제 끝났다" 하며 논문이 완성됩니다. 결론 챕터는 논문의 주장을 챕터별로 다시 간략히 소개하고, 연구의 의의를 밝히고, 또 (저 또는 다른 사람이) 후속으로 들어갈 연구과제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연구결과 발표를 넘어, 연구결과의 가치를 주장하는 챕터라 하겠습니다. 참 길기도 하다- 하는 생각이 들며 참 마음이 복잡한 타이밍입니다.
이 지경에 오면 사실 다 했다는 안도감보다는 불안감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일단 결론을 쓰다 보면 내가 뭘 썼는지, 앞뒤가 잘 맞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 경우가 많고 (...) 또 논문이 처음 완성될 쯔음엔 가을에 시작한 구직활동이 무르익어 불합격 이메일을 무더기로 받기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논문을 잘 썼을까? 내가 틀린 건 없을까"라는 불안감에 더해, "왜 아무도 나를 뽑지 않는 걸까? 내가 이걸로 먹고살 수 있을까?"의 고민이 겹쳐 이 즈음에 스트레스로 몸이나 마음의 건강을 크게 해치는 친구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박사논문의 초고를 완성한 순간부터 지도교수님과 논문 심사 커미티 교수님들이 (으레 해왔듯) 모진 코멘트를 남기는 게 아니라 축하를 해 주시기 시작합니다. 잘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만들기 힘들었을 텐데 애썼다면서요. 논문 내용에 큰 하자가 없다면 (또는 구직과정이 아주 잘 풀려 교수임용 직전까지 왔다면) 논문 디펜스 준비로 바로 넘어가게 됩니다. 모르긴 몰라도, 일단 스스로 맨땅에 헤딩해 연구한 후 내 주장을 책 한 권 분량으로 풀어내 엮어봤다는 그 경험이 박사과정의 정수 아니었나, 그저 짐작만 합니다.
"학자에겐 지역을 잘 알거나 통계를 잘 알고 그래프를 잘 아는 건 중요한 게 아냐, 물론 중요하지만-"
동남아 정치학계에서 큰 족적을 남기신 어느 한 교수님이 사석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비롯, 졸업을 앞둔 박사생 여럿이 그를 둘러싸고 아 ㅠ 교수님 ㅠ 어떡해야 우리가 취직을 하고 교수가 될 수 있을까요 ㅠㅠ 하며 징징대던 참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그분은 요즘 취업시장 개 빡세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연구를 통해 어떤 이론을 도출해 냈고, 그 이론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이냐가 중요한 거야."
보통 북미에서 공부하는 박사후보들은 박사논문을 완성하기 전에 구직활동을 시작하는 게 흔합니다. 많은 학교들이 채용과정에서 찐빠가 나지 않는다면 내년부터 학생을 가르칠 교수를 임용하기 위해 그 전년도부터 채용심사를 하기 때문이죠. 따라, 사실 많은 박사생들이 본인들 논문의 절반 정도, 심하게는 이론과 데이터 분석 챕터 하나만 쓰곤 취업시장에 뛰어들곤 합니다. (고백건대 지금 취업시장에 있는 저도 박사논문을 다 완성하기도 전에 구직활동을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이 시기에 다다르면 박사생들이 학생이 아닌 동료 학자 대접을 받기 시작합니다. 저만 하더라도 이제 지도교수님은 지도를 접으시고, 질문과 제안만 하십니다. 아니다 싶으면 무시해라-는 전제를 다시면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스스로를 돌아보건대 논문을 갓 쓰기 시작한 박사생과 논문을 완성할 때 즈음의 박사생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논문을 완성할 때 즈음에 다다르면 한창 쓰고 있을 때 볼 수 없었던 것이 보이게 됩니다. 지도교수님의 코칭을 통해 이론을 다듬고, 그 이론을 뒷받침할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나열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나의 연구 프로젝트가 어떤 모습을 했는지, 학계라는 큰 산에 어떻게 자리했는지, 그리고 이 연구가 인류를 위해 어떤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냈는지 - 등이 좀 더 명징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림을 한 부분, 한 부분 그리고 다듬다 비로소 그림의 전체를 마주한 느낌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사회과학의 박사는 학술지를 잘 쓰고 통계 그래프를 잘 그리는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글을 잘 쓰고, 출간하고, 여러 방법론과 기술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 보이는 것은 학자로서 참 중요한 능력입니다.
하지만 사회과학 박사는 어쩌면 사회의 여러 현상을 성찰하고, 그 현상의 원인과 결과의 실체를 끄집어내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 쓰는 기술자가 아닌, 사회 어느 현상에도 접목할 수 있는 관점을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관점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 방향을 잡고, 연구도 뚝딱뚝딱 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박사논문을 다 쓰면... 박사 디펜스, 그리고 교수임용을 위한 무한의 데스매치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박사논문 내부심사를 마쳐 이제 외부 심사를 진행 중인 만두박사! 지금껏 만두학 학위도 없이 만두박사를 사칭했던(!) 만두박사는 진짜 박사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구직시장에서 살아남아 교수가 될 수 있을까요? 여름의 끝자락에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