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이제 일어나서 다시 걸어가야지

by flyingfish


우울의 끝에서


번쩍 마음의 눈이 떠졌다.

이제 우울증이, 아니 지금은 거의사라졌다.

이제 코로나가, 아니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우울증 덕택에

코로나 덕택에

세상으로부터

일로부터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리 안락한 곳은 아니었지만

나름 안락하게 도피해 있었던 것 같다.


이유가 없이는 쉬지 못하는 나에게 좋은 이유들이었다.

그렇게 2년 하고도 반이 지나갔다.


내 인생에 2년 하고도 또 반이 지나갔다는 사실이 요 몇 달간은

아까워서, 아쉬워서 동동대는 나를 보았다.


마흔이 넘어가니까, 아프고 힘든 시간이었더라도

아직 젊고 아름다운 이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할지를 아니까,

내 상태랑 상관없이 괜한 조바심이 났다.


상담을 할 때에도 조바심이 났다.

이제 나을 때가 됐는데...

답을 바란 상담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속이야기를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50분 동안 구구절절이 일 년 이상을 이야기하면서

이제 그녀가 나에게 답안지를 줄 거라고 그렇게 가슴 어디엔가는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열심히 열심히 그림도 그렸다.

내 속에 있는 걸 다 토해내고 ,, 노란 위액이 나올 때까지 그렸나 보다.

그리고 매일 짧은 그림일기를 쓰고

또다시 그렇게 회사 생활 마냥 열심히 "나를 찾는 생활"을 했다.

뭐든지 후회 없이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돌아보니...


잠도 잘 오고, 밥도 잘 먹고, 가슴 아픈 증상도 사라지고, 나는 예전의 나와 비슷한 상태로 돌아왔다.

내 생각엔 이제 '우울증'이 아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처럼 인생의 답을 얻고 제2의 인생을 위해 걸을 수 있는 힘이 솟구치지 않는다.

나는 인생을 너무 심플하고 깔끔하고 괜찮은 영화/소설처럼 보았다보다.

소설처럼 제2막이 아주 깔끔하게 시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다시 우울해졌다.

But it's okay

우울증의 끝에는 빛이 내려온다는 어떤 이야기/영화적인 상상력이 나에게 있었나 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우울증'을 통해 얻은 것(깨달음)은 무엇일까?


1) 내 정신력이 통제할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2) 청소와 정리정돈

3) 자기애


인 것 같다.

3번 자기애란 것은,

나는 살면서 어떤 누구에게도 그렇게 절실히 병원도 데려가고 약도 먹여보고, 이부자리도 바꾸어줘 보고, 상담도 시켜줘 보고, 영양가 있는 밥도 먹여주고, 겨울에 따스한 양말을 늘 신겨주어 보고 그래 본적이 없다.

그런데 나에게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대하는 걸 보고 '자존감'이나 이런 것까지 모르겠지만 나를 너무 사랑해마지않고, 살리고 싶고, 살려놓았더니 이제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고...

그래서 나는 나를 대단히 사랑한다고 느꼈다.


우울증에서 한걸음 비껴 나와보니, 내가 이전에 생각했던 '무척' 행복하고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이 별 것 없는 인생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첫걸음은 한국으로 잠시 돌아가 고향이 아닌 곳에서 작은 방을 빌리고, 셰어 스튜디오를 찾고 작은 목표를 하나하나 해내어 볼 것이다.

그림 전시와 함께 프린트를 기반으로 한 상품 몇개를 만들어볼 것이다.


낯선(?) 고국땅에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외국에서 이십 년을 살았듯, 한국에서도 작게 하나하나 만들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