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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a Mar 07. 2022

반장님 다시요, 다시!

지나고 나면 다 괜찮다.

“반장님 벽에서 각각 5센티 떨어진 위치에 조명 선 빼주세요.”

“스프링클러와 빔 프로젝터 사이 딱 가운데 지점에 펜던트 등 달아주세요.”

“거실 TV 앞 천장에 3160, 침실 선반 앞 천장에 2570. 정확히 타공 해 주셔야 해요.”

 

  이 모든 주문의 전제는 ‘(절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였다. 모든 면에서 허술해 빠진 나란 인간은 양심 없게도 공사 반장님들에게는 시종일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함을 선보였다. 이것은 나의 첫 인테리어 분투기이자 나를 제 발로 불교대학에 들어가게 만든 이야기이다.

 

업무상 컴퓨터를 안쓰니 컴맹이 되어버렸다. 손으로 하나하나 적고 그린 인테리어 플랜.




  코로나19로 6개월 쉬고 1달 비행하는 생활이 2년간 이어졌다. 첫 해에 우리는 거대한 이사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 해는 부동산 정책이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다급하게 집을 사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시기였다. 다행히 우리는 조금 발 빠르게 움직였다. 뭘 알고 한 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 부부는 충동구매할 때만큼은 손발이 착착 맞는다. 푸르른 어린이날 ‘산책 삼아 집이나 봐볼까’ 하던 우리는 어느새 “지금 계약금 넣을게요.”를 외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스물몇 번째 부동산 정책은 자꾸만 나오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은행 문턱을 들락거리다 보니 어느새 그 집은 우리 집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사 전에 넘어야 할 큰 산이 또 남았으니 그건 바로 인테리어. 코로나로 다들 집에만 있다 보니 어느 때보다도 인테리어 업계가 호황이었다. 인스타 피드를 보면 왜 남의 집은 다 하나 같이 예쁜지. 이미 올 수리된 집을 매매하긴 했지만 너무나 내 취향과 달랐고 촌스러웠다. 우리는 모든 짐을 컨테이너에 맡기고 오피스텔을 전전하며 인테리어를 감행했다. 강아지, 고양이와 인간 둘. 우리 넷의 2020년 겨울은 그야말로 시트콤이었다.

 



  잔금 날에 맞춰 발품 팔아 동네에서 가장 저렴한 인테리어 업체를 섭외해 뒀다. 뿌듯함도 잠시, 평균에 비해 많이 저렴한 데는 이유가 있었으니 사장님 혼자 운영하시는 곳이라서 저렴한 만큼 남편과 나의 노동력이 엄청나게 들어갔던 것이다.


  매일매일 임시 거처에서 공사현장으로 출근도장을 찍는 날이 이어졌다. 어떤 날은 천장에 타공 하다가 스프링클러 배관을 뚫어버려서 침실이 물바다가 되고, 다음날은 배송 기사님이 150인치 전동 스크린을 지하주차장에 던져두고 가셨다. 그날 남편은 150인치 스크린을 짊어지고 계단으로 23층을 올랐다. 전기공사를 끝내고 나니 TV 설치 기사님이 콘센트 위치가 잘못되어 TV를 설치할 수 없다고 한다. 다시 전기반장님을 불러 콘센트 위치를 내리고, 도배 팀을 불러 거실 벽면을 새로 도배했다. 먼지 풀풀 날리며 붙인 타일은 높낮이가 안 맞았다.

 

뚝딱뚝딱


  이사 날짜는 다가오는데 공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일단 큰 공사만 끝내고 입주 후 나머지 공사를 이어갔다. 화장실 한 개는 변기도 세면대도 없이 시멘트 벽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도배지는 여기저기 터지고 울고 있었다. 내 속도 함께 터졌다.

 

  들어가 살 집이라 그런지 의욕이 앞서 내 눈은 현미경 마냥 크고 작은 하자들을 죄다 찾아냈다. 남편은 ‘이 정도면 괜찮은데’라고 생각하면서도 히스테릭한 나의 지적질에 모두 동의해 줬다. 조그마한 하자라도 발견한 날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주 5일 저녁마다 떡볶이를 먹고도 살이 2킬로가 빠지고 낯빛은 흙색이 되어갔다. 엄마는 날 보고 “이러다 애 잡겠다.” 했다. 인테리어 사장님과 공사 반장님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고 하자 보수 날짜를 잡고, 재 시공을 해도 또다시 하자가 발생하는 루틴으로 3개월이 더 흘렀다. 도배 문제가 있던 벽을 네 번째 재시공하던 날, ‘오늘도 망하면 진짜로 포기하자.’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망했다.

 



  그날 이후로 아예 눈을 감아버리기로 하니 2주 만에 도로 2kg이 찌고 한 달 후에는 총 4kg이 불었다.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다더니 사람 마음이, 스트레스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흐린 눈을 하고 본 우리 집은 너무나 하얗고 예쁘다. 매의 눈으로 들여다보자면 고쳐야 할 곳이 열 군데도 넘지만 1년 동안 살면서 익숙해지고 정이 들어서인지 그땐 나를 미치게 했던 하자들이 이제는 딱히 거슬리지 않는다.

 

완성



  무교인 나는  길로 6개월 과정의 불교대학에 등록했다. 아주 유명한 스님께서 운영하시는 '마음공부' 하는 곳이라 들었다. 잘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집착하고 남들은 눈치도    치의 오차도 견디지 못하는 성향을 어떻게든 고치고 싶었다. 어떤 일을   완벽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아예 시작도   때도 많았다. 스스로를 좀먹는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마음공부란걸 좀 해보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불교대학은 어땠냐고? 나보다 스무 살은 많은 이모님들 사이에서 겨우겨우 출석 일수를 채워 졸업을 하긴 했다. 일체유심조와 인연과보를 남기고, 해탈의 길은 근처도 가보지 못한 채. 그리고 여전히 종교란엔 또박또박 ‘무교’를 적어 넣는다.

 



  이제는 집안 구석구석 어딜 봐도 지난 1년 간 우리 네 식구 행복하게 살았던 기억뿐. 결국은 다 아무렇지도 않은 게 될 걸 그때는 왜 그렇게 전전긍긍했을까.  1미리씩 터져있는 벽지 이음새들을 봐도 이젠 괜찮다. 지금껏 그 누구도 눈치챈 적 없는 완벽히 하얀 벽일 뿐이다. 여전히 0.5센티쯤 휘어 있는 욕실 문지방을 발끝으로 슥슥 문질러본다. 그땐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이 볼록한 문지방이 오늘은 조금 귀엽다.


  그래, 지나고 나면 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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