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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Johan Oct 12. 2023

나는 오늘도 명배우를 꿈꾼다

탈락과 캐스팅 사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고?”


달력을 보니 다음달에 심(SIM) 세션이 잡혀있다. 소화가 갑자기 되지 않으면서 벌써부터 스트레스가 시작된다.


심은 '시뮬레이터(Simulator)'의 약자로 모든 파일럿들이 6개월마다 봐야하는 실기 시험을 뜻한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내 경우에는 이틀에 걸쳐 파일럿 트레이닝과 라이센스 연장 시험을 같이 본다.


한번 면허를 취득하면 중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그 면허가 계속 유지되는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과는 달리 조종사는 은퇴하는 그 날까지 6개월마다 시험을 봐서 본인의 녹슬지 않은 기량을 증명해야만 한다.


떨어지면? 한두번 더 기회를 주고 그래도 안되면 라이센스를 바로 취소해 버린다. 무서운 동네다.


6개월마다 셤을 본다는게 말만 들으면 별거 아닐 수 있지만, 실제로 당해보니 막 생각보다 괜찮지만은 않은듯 하다.


생각보다 6개월이란 시간이 매우 빠르고, 시험의 내용도 그냥 비행을 잘하냐 못하냐 그런 것을 보는게 아니고, 현실이라면 일어나기 매우 힘든 아주 개같은(...) 시나리오를 주고 극한 상황에서 아주 끝까지 짜내기 때문이다.



심 안에서는 멀쩡한 비행기가 없다. 한쪽 엔진은 항상 터져 있는것은 기본이다



예컨대 비행 하면서 한쪽 엔진은 항상 터져 있고(ENG Failure), 그 와중에 다른 비행기는 내쪽으로 돌진해오고 (TCAS Warning), 바람은 갑자기 미쳐돌아가고 착륙도 제대로 못하고 복항해야 하고 (Windshear & G/A), 가끔은 비행기 안에 불도 나고(Smoke) 유압계통도 고장나고(HYD Failure) 조종석 화면도 먹통(FMGC Failure)이 된다.


현실세계에서 비행기 타다가 이런 일이 터지면 원래는 프리패스 끊고 다 같이 요단강 단체관광을 가실 일이지만,


오늘도 이럴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파일럿들이 시뮬레이터 안에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수백명 승객과의 약속이니깐 (끄덕)


“그래서 이번에는 뭐 시험본대?”


먼저 심을 본 한 동료 파일럿에게 물어보니 '크게 걱정할 건 아니다'란 대답이 돌아온다. 먼저 매 맞은 자의 여유다. 그거야 님께서 통과했으니깐 그런거죠…란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지만 참고 열심히 경청한다. 조그만한 실마리라도 얻으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물어보다가 신나서 막 내 얘기를 한다.  


“어떻게 하면 심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까? 저번 평가에서는 목소리가 작다고 교관이 나한테 뭐라 그러더라. 자신감 없게 들린대. 근데 목소리 막 크게 말하고 갑자기 잘 될리가 있나. 미치겠다 정말.”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그가 말한다.


“헤이 조한, 심 평가에서 네 원래 성격은 중요하지 않아. 얘가 원래 이런 애었나 싶을 정도로 연기를 해야 해. 그 공간에서 너는 배우가 돼야만 하는 거야.”


"심 평가에서 네 원래 성격은 중요하지 않아. 얘가 원래 이런 애었나 싶을 정도로 연기를 해야 해. 그 공간에서 너는 배우가 돼야만 하는 거야.”


#1. 페르소나를 쓰는 법


왁자지껄 얘기를 끝내고 그 뒤 이 친구가 한 얘기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페르소나(persona)'가 떠오른다. 옛날 로마 시절 연극무대에서 배우들은 연기를 할 때 가면을 쓰고 했다고 한다. 이 가면이 페르소나다. 이때 당시 배우들은 표정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니 조금 더 편했을 것이다.  


페르소나는 배우에게 필수다. 노련한 배우는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맡은 배역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드라마를 찍는 날 부모님이 위중하거나 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에 취해 연기를 망치면 안된다. 속은 문드러져 가지만 그는 가면을 쓴 채 키스신을 찍고 사람들과 웃고 떠든다.


사실 이는 우리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항상 어떤 배역을 맡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썸을 타면 상대방에게 잘 보이는 페르소나를 써야 한다. 취직을 하면 신입사원에게 어울리는 페르소나를 쓰고 직장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내야 하며, 결혼을 하면 시댁과 친정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페르소나를 써야 한다.

남녀가 서로 사귀면 상대방에게 잘 보이는 페르소나를 써야 한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출처: Canva)


파일럿도 마찬가지다. 유능한 파일럿은 비행할 때 페르소나를 능숙하게 쓴다. 그날 따라 기분이 안 좋을 수 있다. 혹은 당일 아침에 복권에 당첨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안전비행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를 도와주는 것이 파일럿이라면 모두 따라야 하는 비행표준절차, 영어로는 SOP(Standard Operational Procedure)의 존재다.  



#2. 캐스팅과 탈락 사이


이제 심세션을 대할 때 조금은 마음이 편해져도 될 것 같다. 생각해보면 ‘시뮬레이터'라는 공간은 현실세계에서 평소때 일어나지 않을 가상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드라마 오디션 현장과도 같다.


‘시뮬레이터'라는 공간은 현실세계에서 평소때 일어나지 않을 가상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드라마 오디션 현장과도 같다.


감독이 키스신 눈물신 시나리오를 주고 오디션 지원자들을 지켜보고 평가를 내리는 것처럼 심 안에서는 평가관들이 다양한 비상상황 시나리오를 주고 조종사들을 평가한다.


그리고 나는 오디션 현장에서 원하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페르소나를 쓰고 연기를 하는 한 명의 신인 배우인 것이다. 영화 <라라랜드>에서의 여주처럼 신인배우에서 헐리우드 스타가 될 그 날을 위해 고분분투하는 나.



나는 오디션 현장에서 원하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페르소나를 쓰고 연기를 하는 한 명의 신인 배우다. -출처: 영화 <라라랜드>


오디션 평가는 두 개가 전부다. 캐스팅이냐 탈락이냐. 눈물신에서 감정을 폭발해야 하는데 이때 머뭇거리면 바로 오디션 탈락인 것처럼, 비행기가 터지고 불이 옮겨붙는 상황에서는 얼지말고 그에 맞는 행동절차를 연기해야만 한다.  


결국 좋은 파일럿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는 일류배우와도 같다. 이러한 자세는 비단 파일럿뿐 아니라 모든 직업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신인 배우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언젠가는 파일럿에게 어울리는 페르소나를 능숙하게 썼다 벗었다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가면의 종류만 바뀔뿐 그 핵심은 변하지 않기에. 고대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연극과도 같은 것이니깐.


나는 오늘도 명배우를 꿈꾼다.


비오는 어느날 착륙 할때의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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