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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Johan Oct 18. 2023

불운한 조종사를 위한 처방전

처절한 노력도 때론 배신한다

어느날 비행 나가기전 브리핑룸으로 들어서서 오늘의 내가 몰 비행기가 과연 뭘까 체크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되뇌었다. 


"오 마이 갓! 고장난게 몇개야?"


비행기에 고장이 난게 몇개인지 대충 보이는거만 다섯개가 넘는다. 



MEL(Minimum Equipment List)의 일부


서둘러 MEL을 폈다. MEL은 Minimum Equipment List의 약자로, 쉽게 말하면 비행기가 고장이 났을때 이 비행기를 그대로 몰 수 있을지 아닌지, 몰 수 있다면 어느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정리해놓은 메뉴얼이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차 운전을 할때 창문이 안열린다고 가정해보자. 매우 불편하고 짜증이야 나겠지만 '운전해서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일단 가능하긴 하다. 


비행기도 마찬가지다. 고장에도 큰 고장이 있고 작은 고장이 있기에 이런것을 분류해놓고, 작은 고장일 경우 고쳐야 하는 기한을 설정해놓은 뒤 ‘이러저러한 절차를 따르면 일단 오늘 비행기는 뜰 수 있다’를 정리해 놓은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어쨌든 여러대의 비행기를 몰아야 하는 파일럿의 경우, 각 목적지나 시간에 따라 자신이 그날 몰게 될 비행기를 당일날 알게 되는데 각 비행기마다 컨디션이 천차만별이기에 재수 없으면 이렇게 안 좋은 비행기에 당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날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우디의 어느 소도시로 가는 하늘에서 찍은 사진 


함께 해서 더러웠다


이날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날의 비행은 사우디의 어느 소도시. 원래는 그다지 어렵거나하는 곳은 아닌데, 그날따라 본래 사용하던 활주로가 폐쇄되는 바람에 생소한 활주로를 갑자기 배정받았다. 


더 문제는 파일럿들이 착륙할때마다 매우 싫어하는 배풍(Tail Wind)이 쌩쌩 불어오고 있었다는 것. 15kts 이상이면 아예 착륙이 금지될 정도다. 관제에서 알려주기를 10kts 인근이라고 알려왔다. 


어찌어찌 착륙은 하긴 했는데 옆에 있던 캡틴도 "오늘 무슨 날인가?" 이런다. 


그 뒤에도 비행기 주차를 도와주는 지상직원이 늦게 나오고, 심지어 하라는대로 주차도 했는데 이 직원의 실수로 더 앞에다 주차를 잘못 하게 되어 이거 바로 잡느라고 10분정도를 더 기다려야 하고....


이밖에도 여러가지 평소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유달리 이날 많이 벌어졌다. 거기에 맞춰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잔실수도 엄청 많이 나오고, 아주 불만족의 연속이었다. 


겨우겨우 힘든 비행이 끝나고 애꿏은 비행기에게 외쳤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나는 최선을 정녕 다했나 


이렇게 가끔 비행이 정말 꼬이는 날이 있다.  평소라면 잘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이 연속으로 하필 그날에만 계속 생기는 건데, '왜 하필 오늘이지?' 싶은 일들의 연속 투성이다. 


이날 비행이 끝나고 왜 오늘 이런 불행한 일이 오늘 연속적으로 일어났을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냥 '진짜 운이 안좋고 오늘은 그런 운명인가 부다'란 말밖에 못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이게 정말 맞나 싶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운한 일은 모두 예정된 것일까. 나는 왜 평소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데 어느때 불행한 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일까. 기쁜 일은 드문드문 오는데 왜 슬프고 화가 나는 일은 연속적으로 오는 것만 같을까.


사실 정말 드는 생각은 이게 꼭 내 '한계'가 아닐까 두려웠다는 점이다. 


정말 노련한 파일럿이라면 이 모든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고 전부 다 매끄럽게 대처할 것 일텐데...


내가 오늘 이렇게 기분이 안좋았던 건 단지 내 실력과 노력의 부족을 '운이 없다'는 외부요인에서 단지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였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런 자세로 내 자신의 기량이 향상될 수 있을까. 나는 정말로 이날 최선을 다했을까? 응 진짜로?


최선을 다한 사람의 예.tweet


제갈량은 왜 그랬을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 사람의 일을 모두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익숙한 구절이 생각난 것도 이 때였다. 


본래 이 말은 삼국지에서 나왔다고 한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제갈량은 관우에게 조조를 쫓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관우는 목숨을 구걸하는 조조를 보고 살려 보낸다. 


사실 제갈량은 알고 있었다. 관우가 조조와의 과거 인연때문에 그가 조조를 놓아줄 것이라고. 사람들이 나중에 왜 알고 있었음에도 관우를 파견했느냐고 묻자 제갈량은 이렇게 답한다. 


"사람의 일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려야 한다" 


사람의 일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오직 그럴 때에만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깐. 전자를 통해 내 본성을 알게 되고, 후자를 통해 내 한계를 알게 된다고 그들은 얘기했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제갈량은 관우에게 조조를 쫓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관우는 목숨을 구걸하는 조조를 보고 살려 보낸다.


처절한 노력도 때로는 배신하지만


이와 같은 성숙한 태도는 현재 우리 주위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성취한 사람들에게도 자주 보인다. 


만약 그들이 노력을 했는데도 실패한다면 그것은 자신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처절한 노력으로 성공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노력으로만 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산악인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를때 정말 극한까지 숨이 올라차고 한발을 더 딛을 힘조차 없을때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최선을 다해도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단계가 왔다. 말 그대로 하늘에 맡긴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인사 대천명에서 중요한 말은 '진인사'에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한다. 그럴때에만 내가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한계상황에 이를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천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최선을 다한 결과는 좋을 수도 있지만 불행히 나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모두 나의 역량 밖의 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가 좋아도 감사하고 나빠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 극한까지 이른 사람들은 생사에 초연했다. 그 단계에서 불행하게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맹자도 “자신의 도를 다하고 죽는 것이 바로 올바른 명”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을 다 시도해본 사람이라면 삶에 미련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맹자도 이를 두고 “자신의 도를 다하고 죽는 것이 바로 올바른 명”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을 다 시도해본 사람이라면 삶에 미련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내가 비행을 목숨걸고 극한까지 노력할 정도로 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죽을 용기도 없다. 민항사 파일럿이란 직업을 갖고 먹고 살기 위해서 적당히 비행하는 것 말고도 가족의 안위 등 내 주위에 신경써야 할 일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난 뒤 조용히 그 결과를 기다리는 그런 태도는 적어도 필요할 것 같다. 그래야 어떤 결과가 나오든 불운함에 취하지 않고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을테니깐. 


진인사대천명이란 어떻게 보면 진부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이 명언은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진인사대천명이란 어떻게 보면 진부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이 명언은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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