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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탄 Oct 01. 2019

또라이를 이해해보기로 했다

오늘의 행인1 : 한밤의 난폭운전자



외곽도로라든가 대로라든가, 폐를 덜 끼치는 도로가 분명 있을 것이었으나 그 외제차는 하필 주택가라 차도 별로 안 다니는 우리집 앞 작은 도로를 신나게 달려 나갔다. 튜닝한 머플러가 '아아앙' 울어 재꼈고 그걸로도 만족이 안 는지 음악까지 크게 틀어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였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으니 민폐가 확실했다.

신호도 안 지키고 거칠게 좌회전하는 차를 보며, 지나가던 사람들 몇몇이 혀를 끌끌 찼다.  저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은 표정이었으나 어쨌든 지나간 차. 다들 곧 관심 끄고 던 길을 계속 다.

그런데 3분이나 지났을까. 좀 전의 그 ‘부아아앙’ 소리가 내 뒤통수 쪽에서 다시 들렸다. 존재감 뿜뿜 내뱉으며 재등장한 차는 또다시 신호도 안 지키고 달렸고, 이번엔 달려오던 다른 차와 충돌할 뻔했다.

다행히 사고는 없었지만 놀란 상대 차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잔뜩 성난 얼굴을 꺼냈다. 그러나 우리의 ‘부아아앙’은 사과도 도 없이 다시 도로를 달려 나갔다. 부아가 치밀대로 치민 상대 차 운전자의 입에서 기어코 욕이 뱉어다.

“저 또라이 새!”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 아이들도 있는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담배 피우던 아저씨, 지하철 탄 사람들에게 ‘니네 다 잘못 살고 있다’며 시비 걸던 할아버지, 안 깎아준다고 멀쩡한 바나나를 내동댕이치던 아줌마, 신호 무시하고 8차선 도로를 막 건너던 할아버지.

요 며칠, 길에서 본 또라이만 나열해도 이렇게나 많고 다양하다.

 
또라이 직장에서 만났을 땐 더 난감하다. 밥 남긴다고 후배 잡는 선배도 보았고(그렇게 남길 거 같으면 차라리 안 먹는 게 좋지 않겠냐 했다. 대체 지가 뭔 상관??), 자기가 할 일을 며칠 밤샌 후배에게 다 시키고 퇴근하는 파렴치한 케이스도 봤다.

직접 겪은 또라이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셋이나 있는데(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두 사람은 하도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지금도 생각하면 심장 벌렁이게 만드는 조현아식 또라이였고, 나머지 하나는 치근덕과 성추행의 경계를 교묘하게 오가던 추잡하고 더러운 또라이였다. 


이 정도면 또라이를 못 보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돈데, 그렇다면 슬슬 궁금해지는 게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언제부터, 뭐 때문에 이렇게 돌아버린 걸까.



지난 추석, tv 특선 영화로 <국가부도의 날>이 편성되었었다. 1997년의 우리나라 국가부도 사태에 대응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흥미로운 소재였으나 흥미롭지 않은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어 영화 자체는 별로 재밌 않았다.

럼에도 강하게 여운을 남긴 씬이 하나 있었는데, 영화 말미에 허준호 배우가 연기한 ‘갑수’ 공장 외국인 노동자한테 “핫산! 일 똑바로 못해?”하며 악쓰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었다.
 장면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영화 내내 그 그런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갑수는 원래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적당히 소심하고 순박하고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다. 하지만 백화점에 어음 거래 계약을 한 직후 IMF가 터지면서 어음은 종이조각이 되어버렸고, 아파트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절망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수십 년 후, 직원에게 소리를 질러대며 갑질하는 또라이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거다.

 

영화를 쭉 본 사람들은 갑수 행태에 대해 '저 또라이가 다 있나'고 마냥 욕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단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그가 왜 그렇게 변해버렸는지, 영화를 통해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영화에서 생략된 수십 년 동안 그더 이상 세상에 당하지 않기 위해, 가족을 지키고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지 상상이 되니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만나는 또라이들은 영화처럼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서사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만약 그 외제차 운전자가 어쩌다 그런 민폐남이 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그를 향해서도 이해의 시선을 던질 수 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심장이 조여 오는 조현아식 또라이선배들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이렇게 생각해본다. 돈 데는 생략된 서사가 있을 것이다. 세상이 돌았기 때문에 저들도 돌았다. 세상이 안 돌았으면 저들이 저렇게까지 돌았을까.


물론 똑같이 돈 세상에 살고 있지만 돌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가 돌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자기 혼자 훌륭해서가 아니라, 돈 세상을 따라 같이 돌지 않도록 도와 누군가가 있어서일 것이다.

너 왜 돌고 그러니, 무슨 일이니, 힘들겠구나, 내가 대신 미안하다, 돌지 말아라. 또라이가 되어버린 그들에게도 이렇게 말을 걸고 이르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결과는 좀 다르지 않았을까.


뭘 또 이렇게까지 노력해서 또라이를 이해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와 나는 상관없지 않다. 분명 저 또라이가 사는 세상이, 또 내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지금 내 뱃속에서 뭘 하는지 신나게 꿈틀거리고 있는 이 아이가 살아 세상이기 때문이다.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이해는 해봐야겠는 이유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내 주위의 사람들이 돌지 않도록 해야겠다. 세상이 너무 험하다면 나라도 가만히 등 두드려주고, 세상이 너무 무관심하다면 나라도 얘기 좀 들어주.

내가 돌지 않도록 적당히 잡아준 내 주위 사람들에게도 고마워해야지.





<101개의 얼굴에 대한 보고서>

매일 옷깃 스쳐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기록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건네는 안 낯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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