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술탄 Sep 20. 2019

은행나무가 그렇게 잘못했나요

오늘의 행인1 : 은행 피하는 사람들



계절이 지나는 걸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다.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폭염이 계속되다가도 또 때가 되면 하늘이 높아지고 이토록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말이다. 이제 가을이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대부분 두 팔 벌려 이 계절을 반긴다. 노랗고 빨갛게 물드는 낙엽도 구경하고, 여유되는 날엔 퇴근길에 한 정거장 정도 먼저 내려 이 가을의 선선함을 만끽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바람에 떨어진 낙엽이 사라락 날리면 시원하기도 하고 기분도 좋은... 으악!! 아, 잊고 있던 '불청객'이 하나 있다. 거리마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누워있는 노란 물체! 은행이다.


거리의 사람들이 슬슬 땅을 살피며 코를 막고 다닌다. 은행 피하는 계절이 온 거다.


밟으면 ‘윽’…‘가을 불청객’ 은행을 어찌하오리까

"악취 나기 전에" 가로수 은행나무 열매 조기 채취

은행 미리 털고 암나무 퇴출…악취 주범 ‘가을 지뢰’ 방어전

부산시 고약한 냄새 내는 은행 열매 퇴치 나서

포항시, 은행나무 가로수 열매 관리 나선다


포털 사이트 뉴스 탭에서 ‘은행 열매’로 검색하면 나오는 기사 타이틀이다. 은행엔 '가을 불청객'이나 '가을 지뢰'라는 별명이 붙었고 부산시도, 포항시도 은행 처치에 한창이다. 악취로 민원 넣는 사람이 꽤나 많은가 보다. 기사를 읽어보니 냄새가 나기 전에 열매를 다 수거하는 방법, 열매를 맺는 암나무를 뽑아내고 수나무로 바꿔 심는 방법. 크게 두 가지가 지자체들의 대안인가 보았다.



내가 처음 ‘은행의 악취’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 건, 대학생 때나 돼서였다. 온 사방이 나무여서 굳이 가로수를 심을 필요가 없었던 나의 시골 고향엔 은행나무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서울은 달랐다. 자취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에도, 캠퍼스 내에도, 은행나무는 끊이지 않고 보였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예쁘다는 정도의 생각을 하며 학교를 가던 길에,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땅을 보 이리저리 스텝을 꼬아가며 걷고 있었다. 똥을 피하는 건 줄 알았다. 그래, 난 진짜 동네 개들이 바닥에 똥이라도 줄줄이 퍼질러놓고 간 줄 알았다.


에이... 과방에 은행 똥내 엄청나. 누구야? 누가 은행 밟았어?”


선배 한 명이 잔뜩 인상을 쓰며 과방에 있던 들의 신발을 들춰봤다. 그때 알았다. 아, 은행에서 ‘똥내’가 난다고 표현하는구나. 혹시 내가 밟았나 킁킁 신발 냄새를 맡았다. 난 아니었지만,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은행 똥내’라니...


고백하자면 나는 사실 은행 냄새를 좋아한다. 나에게 은행 냄새는 똥내가 아니라 기분좋은 구수한 냄새. 어린 시절, 가을이 되면 동네 할머니들이란 할머니들은 죄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의 작은 발은 지근지근, 은행을 밟고 있었다. 떨어진 은행 과육을 발로 짓이기면 그 속에 딱딱한 은행 알이 드러났다. 그걸 주워다 각자의 마당에서 깨끗이 씻어 그늘에 말린 후, 절구나 펜치로 딱딱한 껍데기를 조심히 깨부순다. 그럼 안에 있는 노오란 은행 열매를 얻을 수 있는데, 반은 식구들이랑 먹고 반은 장에 내다 파는 거였다.

은행은 밥 지을 때도 넣어 먹고 반찬에도 넣어 먹었는데 난 그냥 프라이팬에 구워 먹는 게 제일 좋았다. 방법도 간단하고, 제일 구수했다.



1. 프라이팬 위에서 뜨거운 열을 받은 은행 곧 토독토독 제 몸을 튀어 올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벌써부터 구수한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는데, 군침 나는 걸 인내심 있게 참고 노릇해질 때까지 조금 더 구워야 한다. 그래야 쓴맛 없이 달달하고 고소하게 먹을 수 있다.

2. 소금을 아주 조금 뿌린 뒤 한 번 더 후루룩 골고루 굴린다.

3. 얇게 붙어있는 열매껍질은 볶아지면서 저절로 떨어지는데, 남아있는 부분이 있으면 키친타월 같은 데다 부어서(맨손으로 하면 은행 껍질 말고 손 껍질이 벗겨지니까) 살살 문지르면 잘 떨어진다.

4. 노란 빛깔과 구수한 냄새에 감탄하며 이쑤시개로!! 집어 먹는다. 이쑤시개 하나에 세 개, 네 개 꽂아서 연달아 빼먹으면 더 행복하다.



나무가 때가 되어 제 씨앗을 내는 자연스러운 섭리를  '불청객'이나 '지뢰'로 표현해도 괜찮은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은행 냄새가 쾌한 건 어쩔 수 없지만  몇 분간의 불쾌 때문에 애써 뿌리내린 나무를 뽑아버려도  건지 더 모르겠다.

한여름 땡볕에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때 은행나무가 만들어주는 작은 그늘 덕분에 그나마 인상 좀 풀었던 기억, 다들 잊어버린 걸까. 

 






<101개의 얼굴에 대한 보고서>

매일 옷깃 스쳐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기록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건네는 안 낯선 이야기.







이전 20화 또라이를 이해해보기로 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