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못되게 살고 있다. 특히 일을 하면서는 더 그렇게 됐다.착하게 구니 손해를 봤고 더 바쁘고 더 피곤했다.
일반적인 교양 프로그램의 후반 작업에서 작가가 하는 일은크게 두 가지다. 피디와 함께 영상을 편집하는 것과 최종 편집된 영상에 내레이션 원고를 쓰는 것.
보통 작가가 편집 구성안을 넘기면 그걸 바탕으로 피디가 1차 편집을 완성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진짜 일이 시작되는데, 피디와 작가가 며칠을 앉아서 영상을 무한 수정한다. 수정1, 수정2, 수정3, ... 최종, 진짜최종, 진짜진짜최종, 아씨제발최종이 될 때까지의 반복.
그런데 진짜 일이 시작되기도 전, 1차 편집을 완성해놓은 꼴을 못 본 피디님이 있었다.처음엔 이해하려 했다. 촬영이 길어서 피곤하셨나?내 구성안이 별로였나? 그래, 뭔 사정이 있었겠지. 늦어도별말없는나를 데리고, 그는 아예 1차부터 같이 그림을 붙였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되며 나중엔 내가 처음부터 편집을 같이하는 게 당연해졌다.
"뒤에 반은못했어요. 같이 보면서 붙이죠?"
안 되겠다 싶어서 매번 이러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럴 거면 편집 구성 회의는 왜 하고 구성안은 왜 쓰냐고 나름 차분하고 똑부러지게 말을 했다. 얼굴까지 벌게지며 수긍하는 듯했지만 그의 버릇은 후로도 고쳐지지 않았는데, 후에 한 선배에게 들으니 '좀 쎈' 작가들과 일할 땐 안 그런단다. 아,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가 우스워보였다는 거지?
그 뒤로 나는 자기 업무를 다하지 않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런 류의 사람을 만나면, 안 참고 '좀 쎈' 말투를 꺼내게 됐다.
성실한 것도 때로는 손해다. 60분짜리 다큐 한 편을 서브 작가 둘이서 나눠 만들게 된 적이 있다. 15분 코너 정도 맡고 있던 당시의 내 연차에 30분짜리 vcr을 만든다는 건 엄청난 영광이자 버거운 기회였고, 밤을 새워 겨우 원고를 다 끝내고 나니 거의 졸도 직전이었다. 원고를 보내고 드디어 눈 좀 붙이려는데,총괄 작가님으로부터 문자 하나가 온다. 다른 파트를 맡은 작가가 시간 안에 원고를 다 못 끝낼 것 같으니, 니가 그 원고 뒷부분을 좀 써보고 있으면 어떻겠냐...니요? 하아...
그날 나는,맨날거의 졸도 직전까지만 가고 정작 진짜 졸도를 하지는 않는 내 건장한 신체를 원망하며 다른 파트의 원고 일부를꾸역꾸역 채워 넣었다. 후로몇 번 더 비슷한 일을 겪고 나니 요령을 터득했는데, 일을 빨리 끝내는 건 좋으나 빨리 끝낸 티는 안 내는 게 좋다는 거다.
경험은 교훈을 만들어주었다. "착하게만 살면 안 된다."
십수년 째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때로는 그렇지 못한 이에게 권장까지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마주한 아이의 얼굴을 본 뒤로, 나는이 명제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지 않았을까 싶은 나이였다.뒤로 맨 가방끈을 양손으로 꽉 쥔 채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옆에는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화를 내어 말하고 있었다. 버럭버럭 소리치고 싶은데 길거리라 참고 있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는 게 건너편에서도 보였다. 겨울 같았으면 씩씩대는 콧김까지 다 보일 기세였다.
쟤뭔가엄청 사고쳤나 보다, 집에 가면 완전 혼나겠지, 지금 얼마나 무서울까, 같은 생각을 했다. 저렇게 혼나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 웃음도 좀 났다.
신호가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는 그들이 있던 자리로, 그들은 내쪽으로 걸어오는데,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한엄마의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그러니까 엄마가 뭐랬어. 착하기만 하면 안 돼. 사람이 적당히 못돼야지.”
적당히 못돼야지... 엄마는 아이에게 그런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바쁘고 지치는 하루하루를 조금 덜 힘들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내가 힘들다. 나만 늘 손해보지 않기 위해 취하는 거의 본능적 선택이다.
그런데, 맞는 말인데, 그 엄마의 가르침에왜 이토록 씁쓸해지는 걸까. 가르침을 들으며 고개를 더 푹 숙이던 아이의 얼굴에는 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못되지않고착하기만 한 그 아이는 학교에서 대체무슨 일을 겪은 걸까.
"제가 왜 참아야 하죠?"라는 논조가 꽤 오래 유지되고 있다. 적당히 나쁘게 살아야겠다는 내 신념도, 어쩌면 거기서 힘을 얻은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그동안 착하게꾹꾹 참아온 사람들의 터져버린 울분이니까.
하지만 아이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 나는 이제 좀 다른 신념을 꾸며본다. 적당히 못돼야 살 만한 세상, 착한 사람은 바보인 세상이 되는 것에나도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바보같은 반성이 들어서. 저 아이가 마음 놓고 착해도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해서. 아주 오랜만에, 아닌가 처음인가.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