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에는 ‘보증금 1,000 / 월세 35’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있었다.내 위치에선 그 아래 더 작은 글씨들까진 보이지 않았으나 가격으로 보아 원룸임을 설명하는 말일 듯 했다. 필요하면 떼어갈 수 있도록 잘라놓은 전화번호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청년은 약간 망설이며 그중 하나를 떼었다. 바로 옆의 부동산에는 집 구하는 어플을 홍보하는 광고지가 붙어 있었다.
요즘 월세방은 보통 저런 어플로 거래되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전봇대에 광고가 붙기도 하는구나. 어떤 부분에선 세상이 생각보다 느리게 변하기도 한다.
청년은 전봇대 앞에 그대로 서서 휴대폰을 꺼냈다. 뭔가를 열심히 봤다가 썼다가 했다. 다시 전봇대를 한 번 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앞으로 걸어갔다. 많이 봐야 20대 중후반. 나도 저때쯤, 방을 구하러 다닌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대학 졸업을 한 학기 남겨뒀을 때였나. 나는 신림으로 이사를 했다. 그전엔 학교 근처에 고모가 운영하던 원룸에서 지냈으니, 내가 월세를 내며 살아야 할 집을 구하는 건 그게 처음이었다. 아직 취직 전이라 모아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보증금은 대부분 아빠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나 때문에 또 돈이 나가는 게 죄송해서 최대한 저렴한 방을 찾았다. 깔끔한 신축 원룸은 무조건 패스해야 했다. 아쉽진 않았던 게, 나는 원래 아파트나 오피스텔, 원룸처럼 똑같은 문을 한 집들이 한 복도에 있는 걸 싫어한다. 전에 살던 고모의 신축 원룸 방에 정이 가지 않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저렴한 안목을 가지고 있던 내게 눈에 띈 집이 있었다. 지대가 좀 높은 곳에 위치한 그 집을, 나는 좀 늦은 밤에 보러 갔었다. 집주인의 문자가 안내하는 데로 버스에서 내려 편의점 옆 골목으로 들어갔고 조금 더 걸으니 위를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가로등 불빛이 너무나 찬란하게 뿌려진 계단이었다. 계단을 지나 조금은 숨차는 긴 골목 안에, 길고양이와 함께 친절하게 서있는 집.
안을 보기 전인데도 이작은 문을 매일 들락거리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방의 상태가 적당히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바로 계약을 하기로 했다.
“500에 25짜리는 지금 계약하고 있어요.”
막상 거금 500만 원을 입금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앞에 두니 설마 사기는 아니겠지 하는 두려움에 눈싸움만 하고 있을 때, 나의 갑은 누군가와 통화하며 그렇게 말했다. 500에 25짜리. 그작은 방의 이름인가 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거기서 꼬박 8년을 살았다.
‘500에 25짜리’에 살면서 나는 졸업을 했고, 원하던 일을 시작했다. 많은 음악을 들었고 좋은 책도 읽었고 적당히 더워했고 적당히 추워했다. 털이 북실북실한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기 시작했고 길고양이에게 괜히 미안해 밥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시인이 말한, 시커먼 바다에 나갔다가 날개 젖어 돌아온 나비같이 축 쳐져 들어오는 날도 있었고, 바다를 들판마냥 훨훨 신나게 날다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어느 때건 편히 몸을 들일 방 하나 있다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아주 큰 위안이었다.
따라가려던 건 아니고, 나도 방향이 그쪽이라 청년의 뒤를 밟는 꼴이 되었다. 통화 내용이 문득문득 들렸다. 아마 부동산이거나 집주인이거나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럼 내일 오후에 방을 보러 가겠다는 약속. 그에게도 위안이 되는 적당한 방 하나가 얼른생기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