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2년 차 국제선 승무원, 이름은 채령.
나의 몸은 이제 한국 표준시(KST)를 따르지 않는다.
내게 시간은 시계가 아닌 비행기 문이 닫히는 순간과 호텔 커튼을 여는 순간으로 나뉜다.
시차라는 녀석은 참으로 야속한 마법사다.
서쪽으로 가면 시간을 벌고 동쪽으로 가면 시간을 잃는다. 나는 시간을 벌고 잃는 이 경계를 수도 없이 넘나들며 내 몸의 바이오리듬은 모두 잠든 이 시간에 잠들어야 한다는 원칙을 완전히 상실했다.
오늘 비행은 -파리-
13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호텔에 도착해 억지로 한국 시간의 밤을 흉내 내며 쓰러져 잠들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몸은 낯선 시간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다.
눈이 번쩍 떠졌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파리 시각은 고작 새벽 4시. 한국 시각으로는 갓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12시 무렵이다.
나는 지금 칠흑 같은 파리의 새벽에 혼자 깨어있지만 지구 반대편의 당신은 지금 가장 활기찬 낮의 정중앙에 있다. 모두가 곤히 잠든 새벽의 고요함은 왠지 모를 낭만적 외로움을 불러일으키고 잠들지 못하는 나의 뇌는 이 시간에 한국에서 당신이 겪을 모든 일들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지금 직장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점심 식사를 하고 있겠지. 어쩌면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커피를 마시며 긴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의 낮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숨만 쉬고 있다.
[시차 보정용 간식: 컵라면의 미학]
침대에서 일어나 조용히 챙겨 온 컵라면을 꺼낸다.
파리 시각 새벽 4시에 5성급 호텔 방에서 컵라면을 끓이는 이 행위야말로 나의 비행 인생을 압축하는 듯 하다.
이 시간에 먹는 건 조식도, 야식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시차 보정용 간식이다.
끓는 물을 붓고 꼬들꼬들하게 익는 3분 동안,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에펠탑의 희미한 불빛을 바라본다.
이 호화로운 배경과 테이블 위 초라한 컵라면의 극명한 대비.
젓가락을 들고 후루룩 면발을 빨아들이는 순간, 나는 잠시나마 시차의 외로움을 잊고 '한국인의 맛'이라는 보편적인 안정감을 되찾는다.
이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나의 현실을 당신은 절대 알 수 없다. 당신의 시계로 보자면 지금은 한창 일할 점심시간이니까. 나는 당신의 오후를 위해 조용히 이 새벽의 비밀을 지킨다. 식후에 마시는 커피 대신 컵라면의 뜨거운 국물을 마시며 당신의 오후 5시에 맞춰 보낼 예약 메시지를 작성한다.
나 (예약 메시지): 자기야! 나는 이제 막 일어나서 조식 먹으러 가려고! (실제: 방금 컵라면으로 해장함) 파리의 햇살이 너무 좋아. 너도 곧 퇴근 시간이네? 오늘 하루 잘 마무리하고 힘내!
이처럼 우리의 일상은 아름다운 거짓말로 채워진다.
나의 새벽 4시의 컵라면은 당신의 오후 5시를 위한 '거짓 조식'이 되고 당신의 저녁 7시 퇴근 전화는 나의 오전 힐링 타임이 된다.
나에게 시차는 이제 피로의 원인이기보다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당신의 사랑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도구가 되었다. 시차가 벌어질 때마다 우리는 두 개의 다른 태양 아래에서 서로를 걱정하는 애틋함을 느낀다.
나는 오늘 파리의 새벽 4시에 당신의 정오를 살았고 당신은 한국의 정오에 나의 새벽을 보듬었다.
이처럼 우리의 시차는 그저 우리가 하루를 두 번 더 사랑하게 만드는 조금은 피곤하고 많이 따뜻한 마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