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ying Pie Aug 31. 2024

여름의 끝, 그리스 음식에 반하다.

다음 주 개학을 앞두고, 신 선생은 그제와 어제, 새 학년 준비를 위해 줄줄이 이어진 미팅에 다녀왔습니다. 빈틈없고 부지런한 일잘러 교장 데니스(가명)는, 마치 여름 내내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일감을 연달아 던져줍니다.


올 해는 우리 학교가 6년 만에 돌아오는 교육청 감사를 받는 해라고 합니다. 그 준비를 위해 여느 해 같으면 9월 말까지 제출해야 하는 각종 서류들을 당장 월요일까지 제출하랍니다. 쾅!


올 해의 연구 주제인 딥 러닝(Deep Learning)과, 다른 부서, 학교, 단체들과의 협업을 위한 계획서를 각자 9월 20일까지 제출하랍니다. 뭐라고요? 디, 딥 러닝이요? 그게 뭔가요? “디비디비딥! 딥! 딥! 딥!” 게임은 아는데… 쾅쾅!


지난봄, 교장의 요청으로 밴쿠버 다운타운 이스트 사이드의 노숙인 쉼터를 도울 크리스마스 기부 캠페인을 맡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기간 한 달 정도만 수고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지난해까지 그 일을 담당했던 동료의 말을 들어보니, 당장 학기 초부터 그 일을 추진할 학생 클럽의 멤버들을 모집하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답니다. 쾅쾅쾅!


지난여름 내내 학교일 관련 뇌신경은 플러그를 빼놓고 살았더니 폭죽처럼 쏟아지는 일폭탄에 어안이 벙벙합니다. 우짜스까…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먼지가 뽀얗게 덮인 학교 업무용 컴퓨터를 켜고 앉아있지만, 좀처럼 일의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내일 하면 되지 뭐...


다음날인 오늘 아침, 커피 한잔 진하게 내려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천천히 마십니다. 마음이 여전히 답답합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얼른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 챙겨서 달리기 하러 나갑니다.

(C) Flying Pie
(C) Flying Pie
(C) Flying Pie

아, 역시! 폐부에 찬공기를 좀 넣어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벌써 조금씩 물들어가는 나무들이 마치 흰머리가 조금씩 늘어가는 동년배 친구들처럼 보입니다.


한참을 땀을 흘리며 달리고 오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이제 먹어야죠. 개학을 앞둔 마지막 주말, 오늘은 특별히 아이들과 함께 외식을 했습니다. 지난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처음 갔다가 아주 만족했던 4번 가에 있는 그릭(Greek) 레스토랑을 다시 찾았습니다. 아, 참 맛있네요. 다행히 아이들도 매우 좋아합니다. 다음에 또 오잡니다. 앞으로 매년 여름 방학이 끝나는 마지막 주말에는, 이렇게 그리스 음식을 먹는 것을 가족의 전통으로 정해볼까 합니다. 하하.

(C) Flying Pie
(C) Flying Pie

음식을 나누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지난여름을 돌아보며 감사를 전했습니다. 남편이 한국에서 시어머니와 3주를 보내는 동안 혼자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고, 이후 8월 한 달 동안은 일본에서 온 시누이 가족을 모시느라 수고했던 아내에게 특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모네를 위해 방을 기꺼이 내어주고 불평 한마디 없이 잘 지내주었던 아이들에게도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기특한 우리 아이들은 지금 소파에 서로 몸을 구겨 넣고 엉켜 앉아서, 너무도 진지하게 똥과 방귀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리고 있습니다. 드릅게스리…


이제 진짜 그만 놀고, 신 선생은 다시 일하러 갑니다. 에휴…


글이 지루해질까 봐 앞뒤 사정을 생략했는데, 김룰루 작가님의 댓글을 읽고 보니 제가 우리 교장을 아주 몰상식한 빌런으로 묘사해 놨네요. 교장이 이 글을 볼 일은 없겠지만 괜히 미안해집니다. 하하.

사실은 작년부터 꾸준히 예고도 하고, 전문가 초빙도 여러 차례 하면서 준비 기간을 충분히(?) 주었답니다. 다만 게으른 제가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까지 손 놓고 있었던 거죠.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