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 소개란에도 적었듯이 저는 ’달리며 사진 찍는 수학선생‘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최고의 러너(runner)인 것 같습니다. 성급한 오해는 마시길. 달리기에 재능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달리기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보통 금요일 오후에 퇴근하면 집에 오자마자 바로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주말 내내 매일 달립니다. 그러다 주중에 한 3-4일만 쉬어도 슬슬 다리가 근질근질해 오면서 학교 수업 중에도 집중을 못하고 자꾸 창밖을 내다보며 달리는 상상을 합니다.
저도 젊었을 땐 한 10년 넘게 바벨 들고 쇠질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즐거운 줄 모르고 운동을 했습니다. 운동 자체를 즐겼다기보다는 그 결과물(더 두꺼운 팔뚝과 어깨, 더 선명한 복근 등등)에 집착하느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운동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달리기를 할 때는 기록이고, 등수고, 달린 거리고 뭐고 전혀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그저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뛰는 그 행위 자체가 너무 좋아서 합니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좋고, 비가 오면 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일부러 물 웅덩이를 밟고 첨벙거리며 혼자 낄낄거립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80-90년대 음악을 들으면서 인적 드문 가로수 사이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이클 잭슨이 되어 문워킹으로 미끄러지고, 때론 왬의 조지 마이클이 되어, 여드름 만발하여 방방거리던 중딩시절로 돌아가곤 합니다.
달리기를 하며 얻는 또 다른 즐거움은 바로 사진입니다. 저는 사진을 좋아합니다. 특히 풍경 사진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사진 찍기와 달리기는 아주 찰떡궁합이죠. 그래서 물론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겠지만, 몇 년 전에 큰맘 먹고 Ricoh GR3라는 아주 작지만 미친(?) 고성능의 똑딱이 카메라를 하나 장만해서 허리에 차고 달립니다. 그렇게 밴쿠버의 구석구석을 달리면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끔 아주 잘 나온 사진들은 프린트해서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기쁨도 매우 큽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달리기를 하면서 종종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받기도 하는데, 과연 우리 호모 사피엔스에게 달리기 만한 운동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평소 따로 시간을 내서 명상이나 묵상을 하지는 않기에, 이렇게 달리는 동안 머리를 비우고 리셋하는 시간이 제게는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저는 그래서 스트레스가 좀 쌓인다 싶으면 바로 나가서 뜁니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가끔은 아주 오래된 아픈 마음도 치유하고 다스리게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합니다. 힘을 완전히 빼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하게 한참을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무의식으로부터 스멀스멀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가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던 아주 오래전 기억들이 되살아날 때가 있는데요, 이게 아주 요물입니다. 당시엔 별일 아닌 듯 넘겨버렸던, 딱히 상처받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냥 툭 던지듯 내뱉은 사소한 말 한마디가 불같이 되살아나 잠시동안 저를 삼켜버릴 때가 있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일들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당시엔 큰 상처가 되었던 일이었다 하더라도, 가족이나 친구들과는 인연이 지속되다 보니, 오해를 풀고 관계회복을 할 기회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내 인생에 별 의미도 없는, 일회성 이거나 짧은 기간 스쳐 지나간 사람들과의 일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아주 오래도록 아프게 할 때가 많더군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내뱉은 말이나 평가들, 그리고 (오해일 수 도 있지만) 나를 무시하는 듯한 비웃음들은 20-30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떠올라 제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근데 이게 너무 사소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하죠.
아무개 씨, 오늘 갑자기 그때 그 일이 생각나네요.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은 나를 잘 몰랐고 내가 처한 상황도 몰랐잖아요. 그래도 좀 경솔하셨어요.
반대로 그동안 저한테 상처받으신 분들도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특히 사과할 기회도 없이 스쳐 지나가 인연이 끊긴 분들... 정말 미안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저처럼 달리기 하다가 제 생각이 나더라도 부디 용서해 주시길.
달리기를 하면서 이렇게 떠오르는 기억들을, 그때보다 조금은 성숙해진 지금의 마음으로 바라봐 주고, 또 한 번 보듬어 주기만 해도,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저는 그래서 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