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에반스의 소설 The Correspondent
버지니아 에반스(Virginia Evans)의 데뷔소설 ‘The Correspondent’를 막 끝냈다. 아주 오랜만에 이렇게 “나중에 꼭 다시 읽고 싶은 소설”을 만나서 기쁘다. 이 소설은 70대의 은퇴한 변호사이자 까칠한 성격의 독거노인 시빌 반 앤트워프(Sybil Van Antwerp)가 편지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직면하고 진정한 용서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서간체 형식의 소설이다.
주인공 시빌은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황반변성을 앓고 있지만 매일 정성스럽게 정원을 관리하고 책상을 정돈하고 펜을 들어 손 편지를 쓴다. 저자는 그녀가 가족, 이웃, 친구, 그리고 수많은 낯선 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음식으로 치자면 자극적인 제육볶음 같은 맛이 아니라 맑은 바지락 조갯국 같은 소설이었는데 여운이 많이 남는다. 읽는 내내 나도 괜히 덩달아 손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손글씨로는 크리스마스 카드 몇 줄 쓰는 것도 힘들어하는 주제를 파악하고, 그냥 이메일과 카톡과 댓글 소통이라도 더 잘하자로 결론을 내렸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8살 때 여름휴가를 갔다가 비극적인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들 길버트가 있다. 시빌은 가족휴가를 가서도 일에 몰두하느라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괴로워하며,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었던 남편 단(Daan)과 이혼했고, 남은 자녀인 피오나, 브루스와도 마음의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특히 피오나와의 관계는 서먹함을 너머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가족, 친구, 이웃들 외에도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카즈오 이시구로를 비롯한 유명인들에게도 편지를 썼고 생각보다 많은 답장을 받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나도 이 소설의 저자인 버지니아 에반스에게 편지를 써볼까? 과연 그녀는 답장을 해줄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또한 과거 판사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길버트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맡게 되었던 사건에서 피의자 엔조의 아내가 선처를 빌었을 때 그것을 매몰차게 모른척해서 그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게 되었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훗날 협박 편지를 보낸 엔조의 아들 데지(Dezi)와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용서하고 화해를 하게 된다. 그녀의 편지 중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역시 죽은 아들 길버트에게 쓴 편지들이었는데, 그녀는 반세기 가까이 길버트에게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며 고립된 내면을 달래 왔다.
전남편 단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계기로 딸 피오나와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기도 했지만 시빌은 딸에게 보낸 절절한 편지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슬픔을 온전히 드러내며 수십 년간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연다. 또한 DNA 검사를 통해 늦게나마 찾은 자매 해티와 교류하며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매년 장미를 선물하며 곁을 지켜준 다정한 이웃 테오도르와 노년의 로맨스를 꽃피우며 삶의 온기를 되찾는다. 시빌의 마지막을 지켜준 사람이 가족도 평생 친구도 아닌 테오도르라는 사실은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함께할 사람을 선택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이 소설은 아무리 늦었더라도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고, 또 청하는 것이 구원이 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마지막 순간, 살아있었다면 지금 54세가 되었을 죽은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마침내 'Your mother'라고 서명하며 평생의 짐을 내려놓는 시빌의 모습을 보는데 주책맞게 눈물이 고였다. 안타깝게도 한국어 번역본은 아직 발간되지 않아서 영어로 읽을 수밖에 없지만, 한국인의 성정에도 잘 맞는 소설이니 가까운 미래에 한국에도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이미지 출처: https://www.amazon.ca/Correspondent-Novel-Virginia-Evans/dp/0593798430/ref=tmm_hrd_swatch_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