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비어든
야반도주는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서 결행하는 대표적인 탈주 형식이다. 오늘날에도 예외적으로 사업이 부도나거나 과도한 채무 빚을 감당하지 못하여 주위 몰래 밤중에 도망하는 경우에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현실의 각박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욕망으로서 꿈꾸는 탈주가 태반이고, 그것은 대개 환상의 형태를 취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분주한 출근길에 꾸는 환상 중의 하나가 회사 일이나 집안 사정에 개의치 않고 그 길로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것이다. 물론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는 굳이 그같은 일탈의 형식이 아니라 휴가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월급쟁이든 내 사업을 하든 하루이틀 휴가를 낸다는 것도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그게 말 그대로 일상이다.
로메어 비어든(Romare Bearden, 1911-1988)의 <내일 멀리 떠날 수도 있어>(Tomorrow I may be far away)는 어릴 적 탈주 동경에 대한 소묘이다. 그림 제목은 에디트 존슨이 1929년에 부른 노래 "굿치브블루스"(Good Chib Blues)의 가사에서 따왔다. 노래는 "아, 내일 멀리 떠날 수도 있어. 오, 내일 멀리 떠날 수도 있어. 나 보고 자이브 춤추자 하지마. 달콤한 말로도 날 붙들 수는 없어. ......"로 이어진다.
화면 오른쪽 상단부에 언덕위로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고 있다. 기차는 언제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탈주를 가능케 하는 상징수단이다. 전경으로 집의 바깥벽 앞에 나이든 인물이 담배를 꼬나 물고 앉아 있고, 창으로 아이가 밖을 내다보는 모습이 보인다. 우측 공간에는 여자로 보이는 다른 인물이 마당에서 일을 보고 있다.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보고 싶은 열망을 가진 이는 아마도 창문에서 내다보고 있는 소년의 것일 게다. 아니면 가족 모두의 열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열망의 정도는 소년이 가장 절실한 모양이다. 얼굴이며 눈동자, 창턱에 걸친 손이 어느 인물의 것보다도 훨씬 더 크게 묘사되어 았다.
비어든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이들 흑인들이 갈망하고 동경하였던 현대적 의미의 탈주를 연상케 한다. 이들은 미국 남부의 열악한 처지에서 벗어나 보다 나은 생활을 꿈꾸며 북부로 이주하였다. 그림은 이주 전의 동경이거나 이주 후에 남부 고향과 같은 포근함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과 동시에 은유의 형식을 이중적으로 가짐으로써 그의 그림은 떠남을 열망하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으로 진전된다.
작품의 형식이 독특하다. 콜라주인데 이는 풀로 붙인다는 뜻이다. 입체파들이 시도한 것으로 신문지나 벽지, 악보 등 인쇄물을 붙여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나중에는 이를 확대해 캔버스와 이질적인 재료나 잡지의 삽화, 기사를 오려 붙여 이미지의 연쇄반응을 일으킴으로써 부조리나 냉소를 겨냥하는 사회풍자적인 포토몽타주로까지 발전하였다. 비어든은 대표적인 콜라주 화가이다. 그는 콜라주를 통해 대상이 놓여 있는 본래의 문맥을 바꾸고 새로운 공간과 형태의 조합을 시도함으로써 다른 질감을 얻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의미가 확장된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콜라주라는 매체를 통해 재즈와 블루스의 어법을 시각적인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 그림에서도 그는 즉흥적인 재즈나 블루스의 간격과 반복을 시각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대상의 척도 크기의 변화, 색감이나 형태에서의 단절, 어수선한 시점 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림은 잡지나 카달로그, 포장지, 벽지, 사진복제물의 조각들을 붙이고 그 조각들 사이로 직접 목탄과 흑연으로 그려서 완성하였다. 그 결과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표면을 얻어내고 있다.
비어든의 이 콜라주처럼 삶은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 재즈나 블루스의 조각들로 끊임없이 변주되면서 반복되는 음율인지도 모른다. 떠나고 싶은 열망들을 품고 하루하루의 일상을 보내지만, 어느날 그렇게 꿈꾸던 탈주와 일상의 탈격에 성공하고 나면 이내 다시 또 그 일상이 그립지 않던가. 그리고 일상으로의 익숙한 복귀에 배반감 같은 편안함이 느껴지지 않던가. 그것도 매번 반복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