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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 Mar 03. 2016

심연보다 깊은

33-  랑송

놀랍게도 "푸른 방"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그림들이 여럿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파블로 피카소와 수잔 발라동의 동명 작품이 유명하다. 피카소의 것은 목욕하는 여인 그림이고 발라동의 것은 쇼파에 누워 있는 여인 그림이다. 이 두 그림에서 창은 옆 배경으로 나오거나 아예 눈에 띄지 않올 정도로 별 비중이 없다. 반면 상대적으로 랑송의 이 그림은 창문이 전면의 중심에 있어 관람자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푸른 방의 농담이 창밖 햇빛으로 인해 가장 엷게 표현되면서 오히려 더 두드러지고 있다.

  방의 색깔은 다양하겠지만 유독 "푸른 방"의 제재 이미지는 특별하다. 푸른색은 차갑고 어두운 밤의 색이다. 그에 따라 우울함, 고독, 침잠, 외로움, 쓸쓸함, 번민, 번뇌, 절망 등을 상징한다. 피카소만 하더라도 젊은 날의 한 4년 기간 동안을 청색시대라 칭하는데, 이는 친구 까사헤마스의 자살 이후 충격과 비통 속에서 가난과 싸우던 고단하고 힘든 시기의 우울하고 비관적인 심정을 온통 푸른 색조로 표현하고 있어서이다.

  폴 랑송(Paul Ranson, 1864-1909)의 <푸른 방> 역시 그림 전체가 푸른 색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황갈색의 전라 여인이 등을 돌린 채 침대 위에 기대어 앉아 있다. 그 강렬한 보색 대비로 관람자의 시선은 여인에게 집중된다. 얼굴 표정을 알 수 없어 여인의 심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방안 전체의 푸른 색조로 짐작컨대는 상심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병의 식물 줄기와 잎파리가 괴기스럽게 흐느적거리고 있어 마치 생기를 잃고 무기력하게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여인을 덮칠 것만 같다. 창문 양 옆으로 커튼처럼 보이는 일단의 어지러운 선들의 움직임은 피어오르는 여인의 암울한 망상으로도 느껴진다. 어두운 실내와는 달리 하얗게 빛나는 창밖은 희망과 구원인듯이 눈부시다.

  랑송은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나비(Navis)파의 일원으로 나중에는 랑송아카데미( Académie Ranson )를 만들어 나비파의 미학적 언어를 체계적으로 전파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푸른 방>에서도 인상주의 이후 나비파가 새롭고 진취적인 미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복합적으로 수용하였던 특성 요소들인 고갱의 순수한 색채, 르동의 상징주의, 일본 목판화의 구성, 응용미술의 장식성 등을  엿볼 수 있다.

  인생의 어느 고비에는 깊은 바다 속 심연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절망과 고통의 깊은 바닷속은 감청색으로 어둡고 차갑다. 그때 올려다 보는 수면 위는 반대로 희망의 태양빛으로 투명하리 만큼 새하얗다. 그 체감 거리는 결코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단 한순간이 필요하다.  솟구침은 바로 지금 여기 이 바닥을 박차는 짧은 그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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