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 모딜리아니
자연스럽게 창은 통로로 인식된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더 이상 이승의 질곡을 견디지 못할 때 이를 다털어버리고 단숨에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창으로 몸을 던지는 참극이 미술사에서 비극적 사랑의 신화가 된 것이 있으니 바로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 Jeanne Hébuterne의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알콜중독과 마약으로 쇠약해져 가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1920년 1월 24일 결핵성 뇌막염으로 끝내 사망한다. 이때 모딜리아니의 나이는 36살로 한창 예술혼을 불태우려는 순간이었다. 잔 에뷔테른과 같이 한 시간은 고작 3년에 불과하였다. 14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은 불같은 사랑이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가자 잔은 더이상 삶을 살아낼 의욕을 상실하고 그의 뒤를 따르고 만다. 모딜리아니의 장례식 전날인 1월 26일 그러니까 모딜리아니가 죽은 지 이틀 뒤 그녀는 친정 아파트 5층 창문에서 몸을 날려 아직 채 피지도 못한 22살의 짧은 생을 그대로 마감해 버렸다. 더욱 더 비극적인 것은 뱃속에는 8개월된 둘째 아이가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모성마저 가려버린 눈먼 사랑이었다.
그들이 만난 것은 1917년 봄 파리에서였다. 러시아 조각가 차나 오를로프Chana Orloff 가 츠구하루 후지타 Tsuguharu Foujita의 모델이던 잔 에뷔테른을 모딜리아니에게 소개하였다. 에뷔테른은 이때 19살의 아리따운 화가 지망생이었고, 모딜리아니는 33살이었다. 이들은 곧 서로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던 잔의 부모는 모딜리아니를 부랑자나 다름없이 여겨 이들의 교제를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아직 스물도 안된 어린 딸이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자 끝내는 딸과 의절하였다. 이들은 곧 함께 살기 시작하였다. 잔은 모딜리아니가 그리는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모딜리아니 예술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이때 그린 잔의 초상화은 20여 점이 된다.
<모자를 쓰고 목걸이를 한 잔 에뷔테른> 역시 그 무렵 그려진 것이다. 모딜리아니 그림의 특징들인 계란형 얼굴하며 기다란 인물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나중에 그려진 그의 다른 초상화 인물들에서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것과는 달리 잔의 경우는 눈동자가 그려져 있어 이채롭다. 화가가 한 말에 따르면 모델의 영혼이 보일 때 눈동자를 그릴 수 있다고 했는데, 잔의 영혼은 고스란히 다 보였던 모양이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가운데 창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는 것은 드물다. 아무런 장식없이 의자에 앉은 모습이거나 배경이 있더라도 실내의 벽이나 문 정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잔의 초상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그림에는 인물의 뒷배경으로 실내의 가구 뒤로 창의 일부가 보인다. 3년 뒤 그 비극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지나친 억지춘향일 게다. 어쨌거나 창은 이 비련의 주인공들을 사후에서도 서로 연결시켜 준 영원에의 통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