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르누아르
1874년 4월 15일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개막되었다. 살롱전보다 보름 앞서 개최한 것은 낙선작으로 오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입장료는 1프랑이었다. 전시회에는 30명의 화가들이 총 165점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이 전시회에 6점을 출품해서 3점을 판매하였는데, <특별관람석>은 그중 하나이다.
오페라는 19세기 후반 파리지앵들의 문화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를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르누아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특별히 오페라 공연장을 좋아하였다. 그는 오페라 공연장이 고상한 파리지앵들을 관찰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르누아르는 생 조르주 거리에 있는 그의 화실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극장인 “테아트리 데 바리에테”(Theatre des Varietes)에 자주 들르곤 했다. 르누아르의 아들 장에 따르면, 르누아르는 극장에 가는 것을 마치 다른 사람들이 일요일 날 산책하는 것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젊었을 때에는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공연을 결코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
<특별관람석>의 남자 모델은 르누아르의 동생인 에드몽이고, 여자 모델은 나니 로페스이다. 여인의 흰 드레스와 흰 장갑에 검은 색 줄무늬의 숄, 그리고 남자의 흰 셔츠에 검은 상의, 흰 장갑과 까만 쌍안경 등이 보여주는 선명한 흑백 대비 효과가 강렬하다. 당시 여성들은 세계 최고로 인정받던 파리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만든 아름다운 드레스를 경쟁적으로 입고서 극장에 나왔으며, 세련되고 값비싼 보석과 액세서리로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그림의 여인도 머리와 가슴에 꽃 장식하며 반짝이는 귀걸이에 목에 일곱 줄이나 두를 정도로 긴 목걸이로 한껏 멋을 부렸다. 그림의 남자는 무대 공연에는 관심이 없고 관람객 중에서 유명인사를 찾고 있다. 아니면 그러는 척하면서 옆자리 여인을 놔두고 어디 더 멋진 여인이 없나 하고 한눈을 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의 두 번째 버전도 있는데, 바로 <관람석에서>이다. 여기에서는 인물들이 정면이 아닌 옆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선의 경계를 흐리게 처리한 붓터치가 은은한 분위기를 만들어 화면 속 남녀간의 온화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수집가 부부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제작된 이후 개인 소장품으로만 보관되어 왔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는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하루 관람객의 규모도 개막식 당일 175명, 마지막 날 54명 정도 수준이었다. 개막 4주차에 집계된 입장객 총 수는 기껏 3,500명에 불과하였다. 같은 해 살롱전의 관람객 수가 6주간에 총 40만명에 이른 것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실적이었다. 관람객의 호응뿐 아니라 비평가들의 평도 혹평에 냉소적이었다. 그래도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듬해 국영경매장인 드루오 경매장에서 그림의 경매를 추진하였다. 바람과는 달리 여전히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아 경매장에서 그림이 소개될 때, 비웃음과 혹평,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이들이 있어, 경매사가 경찰을 부르는 해프닝까지 일어났다.
경매에서 <특별관람석>은 화상인 마르탱에게 425프랑에 팔렸다. 하지만 르누아르의 나머지 그림은 대부분은 100프랑을 넘지 못했고, 판매총액도 2,251프랑에 불과하였다. 이 때 르누아르의 그림을 구입한 이들은 나중에 큰 수익을 얻었을 것이다. 이 경매에서 300프랑에 팔린 <퐁뇌프>는 45년쯤 지난 후 르누아르가 죽은 해이기도 한 1919년에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액수인 10만프랑에 팔렸다. 그러나 이는 나중 일이다. 르누아르는 이 판매대금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몽마르트의 코르토가 12번지의 정원을 임대할 수 있었다.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한 르누아르의 그림으로는 이외에도 <첫 외출>(1877), <극장 관람석>(1880) 등이 있다. <첫 외출>은 앳된 소녀가 오페라 극장에 처음 와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그때까지 상상하고 꿈꾸어 온 매혹적인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소녀의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모습이 잘 포착되어 있다. 당시 파리 극장에서는 신사가 동행한 숙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흰 종이에 싼 꽃다발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소녀의 왼손에도 예의 그 꽃다발이 들려져 있다. 다른 관람객들은 그저 뿌연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인상만이 그려진 채 배경을 이루고 있다.
<특별관람석> 이후 르누아르는 아르장퇴유에서 모네와 함께 작업하면서 보다 인상주의적인 기법과 전망에 대해 깊이 천착했다. 그 결과 <첫 외출>에서 드로잉의 엄밀성은 형체를 둘러싸고 있는 반짝거리는 색감의 외피로 대체되었고, 이를 통해서 다른 그림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간적 실체감을 얻고 있다. 색감에서도 앞서 <특별관람석>에서의 풍부한 검정색 대신에 군청색이 색감의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극장 관람석>에서도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두 여인이 등장하는데, 거의 초상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여인들은 꽃다발과 함께 공연되는 곡의 악보를 쥐고 있다. 정면 여인이 입고 있는 까만 드레스의 질감이 그대로 전달된다.
르누아르와 오페라와의 인연은 우연찮게도 계속 이어졌다. 그는 1881년 10월 아내 알린과 함께 이탈리아로 몇 달간 여행을 떠났다. 베니스, 피렌체, 로마를 거쳐 나폴리와 폼베이를 두루 돌아보고, 1882년 1월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도착해 그곳에서 잠시 머물러 있었다. 이때 그는 친구 쥘 드 브라예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사연인즉, 음악애호가였던 그가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당시 팔레르모에 머물고 있던 이 위대한 독일 작곡가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바그너는 당시 그곳에서 자신의 최후의 음악극인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의 작곡을 막 마친 상태였다. 1882년 1월 15일 르누아르는 30분 정도 시간을 내준 바그너를 모델로 작품의 윤곽을 잡은 다음, 작업실로 돌아와 그림을 완성하였다. 곧 <리하르트 바그너의 초상>이 그것이다. 인물 배경의 현란한 색감이 위대한 음악가의 아우라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르누아르는 이후 1896년에 독일 바이로이트를 여행하면서, 바그너의 파르지팔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긴 공연 시간 동안 내내 지루해 했다. 얼마나 지겨웠는지 심지어 시간이 얼마나 되었나 보려고 대담하게도 성냥을 켜서 시계를 들여다 볼 정도였다. 50대 중반에 이르러서 미술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오페라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