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상주의

차라도 한 잔?

10-메리 카셋

by 유시
카셋, 차 한 잔, 1897, 종이에 파스텔, 54×73cm, 개인소장

메리 카셋의 그림은 때로 자신과 마찬가지인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들을 그린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차 마시는 것, 극장에 가는 것, 아이들 돌보는 것 등 여성들이 주로 활동하는 모습들을 묘사하는 그림들이 그것이다.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 초반에 걸쳐 카셋은 차 마시는 것과 같은 집안에서의 사회적 의례에 참여하는 여성들을 여러 점 그렸다.

카셋은 1877년에 드가의 권유로 독립 예술가 모임에 합류하였다. 이 모임은 나중에 인상주의자들로 불리게 될 화가 집단이었다. 관례적인 예술을 따르지 않았던 카셋은 드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로써 카셋은 모리조와 더불어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한 여성화가중 하나가 되었다.

카셋, 차, 1880, 캔버스에 유채, 64.7×92.7cm, 보스턴, 보스턴미술관

<차>(1880)는 여성들이 가정에서 손님과 함께 차를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고급 줄무늬 벽지를 비롯해, 틀에 짜여진 그림으로 정교하게 치장이 된 대리석 벽난로는 상류층 중간계급 파리 시민의 집안 실내 장식의 전형이다. 또한 테이블 위에 놓인 고풍스러운 은 찻잔 세트는 특출한 집안 내력을 암시한다. 벽지의 줄무늬 사이로 묻혀서 잘 보이지 않지만 벽난로 바로 옆으로 맨 오른쪽 줄무늬와 겹쳐 있는 밧줄이 있는데, 이 줄은 하인들을 부를 때 쓰는 줄이다.

집주인은 손님과 같이 차를 마시지 않는지 찻잔이 아직 쟁반 위에 놓여 있다. 그들은 대화도 하지 않고 있다. 주인 여자는 옆 모습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고, 찾아온 손님은 홀로 다른 데를 쳐다보며 차만 홀짝거리고 있다. 거실의 치장은 화려하고 고급스럽지만 분위기는 다소 거북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카셋의 이 그림이 갖는 관례적인 회화와의 차이점은 구성적 측면에서 인물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과거의 통례를 거부한 점이다. 그림에서 찻잔 세트가 인물 못지 않는 비중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카셋에게 영향을 주었던 드가의 경우에는 더 나아가 인물의 얼굴 자체를 모호하게 그리기까지 하였다. 이 그림에서도 손님으로 온 여인의 얼굴은 마시는 찻잔에 가려서 눈만 남긴 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차를 소재로 카셋이 그린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차분하다 못해 다소 엄격한 분위기를 풍기거나 침잠되어 있다.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거나 두 인물이 등장하여도 정답게 이야기한다기보다는 서로 독자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카셋, 차 한 잔, 1880-1881, 캔버스에 유채, 92.4 x 65.4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차 한 잔>(1880-1881)의 경우도 혼자서 사색하며 차를 마시는 모습이다. 모델은 화가의 언니인 리디아이다. 리디아는 카셋이 제일 좋아했던 동기로 1877년 부모를 따라 파리로 건너왔으며, 종종 동생의 그림 앞에 포즈를 취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신장에 문제가 생기는 브라이트병을 앓다가 1882년 45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림에서 쇼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리디아의 모습은 시선을 내려깐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인물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우울하게 침잠해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호전되지 않는 병세로 인한 비관적인 생각들 때문일 것이다.

카셋, 티테이블의 여인, 1883, 캔버스에 유채, 73.7×61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티테이블의 여인> 역시 다소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의 여성이 티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의 모델은 화가 어머니의 사촌인 로버트 무어 리들 부인이다. 1883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2년쯤 뒤에 완성되었지만, 그 딸이 자신의 어머니의 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는 바람에 내내 한쪽에 처박혀 있었다. 이후 1892년 리들 부인이 사망하고 한참이 지난 1914년에 화가의 친구인 해브메이어가 그림을 보고 전시하자고 하여 뒤랑뤼엘 화랑에 전시되었다.

카셋, 오후 차 모임, 1891, 드라이포인트와 애쿼틴트, 42.5 x 31.1 cm,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1880년대에 카셋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수채화 같은 효과를 내는 부식 동판화 기법인 애쿼틴트를 통한 실험을 하였다. 10개의 칼러 프린트 시리즈 가운데, 차를 소재로 한 것도 있는데, 바로 <오후의 차 모임>이다. 이 그림은 한 젊은 여인이 손님에게 차와 케이크를 대접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하지만 화면 속의 여인들은 그렇게 친숙한 사이는 아닌 듯하다. 내방을 한 왼쪽 여인은 실내에서도 여전히 모자를 쓰고 있고 외투도 걸친 채로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이야기를 나눌 마음도 없는 어떤 예의상의 방문 자리인 것 같다. 집주인이 권하는 케이크도 마지 못해서 살짝 손만 짧게 내밀어 집어 들고 있다.


오후에 갖는 이같은 차 모임은 19세기의 여인네들에게는 하나의 관습이자 문화였다. 오후에 마시는 차인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는 원래 영국에서 늦게 먹는 저녁 전에 요기를 달랠 겸 다과와 함께 차를 마시는 관행에서 비롯되었다. 다과회에는 지인들을 초대하였으며, 이는 곧 우정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처음에는 귀족들의 사교를 위한 것으로 상류층에서 시작되었으나 차츰 일반 가정에까지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출신 안드레오티의 복고적인 로코코풍의 그림 <오후의 차>는 상류사회 티파티의 모습을 보여준다.

페데리코 안드레오티, 오후 차,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60×74cm, 개인소장

차를 소재로 한 카셋의 판화 중에는 흑백 에칭화인 <차>(1890년경)도 있다. 여기에서도 한 여인이 부채를 들고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카셋, 차, 1890년 경, 에칭, 35.2 x 21.3 cm

카셋이 차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들은 이처럼 대부분 혼자이거나 두 명 정도의 인물이 등장한다. <티테이블의 여인>에서처럼 비록 찻잔이 여러 개 준비되어 있어도 그림의 인물은 혼자이다. 파스텔로 부드럽게 그린 <차 한 잔>(1897)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여인이 차를 마시는 데 여전히 혼자이다. 마치 개인 초상화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들 초상화는 일부 초상 화가들이 요새로 치면 포샵 처리를 해 주듯이 미화하여 그리는 것과는 달리, <티테이블의 여인>에서처럼 그림의 주인쪽에서 수령을 거부할 정도로 사실 그대로 엄정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베르트 모리조,리 카셋 이외에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했던 여성 화가로 마리 브라크몽(Marie Bracquemond)이 더 있는데, 그녀가 그린 차 소재의 그림으로 <오후의 차>(1880)가 있다. 홀로 있는 여인을 그린 이 그림의 모델은 화가의 자매인 루이즈 키보롱이다. 이 여인은 야외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다.


마리 브라크몽, 오후의 차, 1880, 캔버스에 유채, 81.5×61.5cm, 파리, 쁘띠팔레 미술관

이처럼 차를 마시는 공간이 실내인 것만도 아니며, 차를 마시며 꼭 담소만을 나누는 것도 아니다. 모여서 차를 마시면서도 각자 자신이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동시에 같이 했다. 벨기에의 신인상주의 화가인 테오 반 뤼셀베르그의 또다른 그림 <정원에서의 여름날 오후의 차>를 보면, 세 여인이 각자 차를 마시기도 하고 손수건에 수를 놓거나 책을 읽고 있다.

테오 반 뤼셀베르그, 정원에서의 여름날 오후 차, 1901, 브뤼셀, 익셀미술관

그밖에도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린 차 관련 그림들이 있는데,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차 마시는 시간>이나 툴루즈 로트렉의 <알린 길베르 부인>, 제임스 티소의 <차> 등이 그것이다. 르누아르는 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차를 마시는 상류층 귀부인의 모습을 르누아르 특유의 부드러운 필치로 표현하고 있다.

르누아르, 차 마시는 시간, 1911, 캔버스에 유채, 92.1 x 73.7 cm, 필라델피아, 바네스재단
티소, 차, 1872, 목판에 유채, 66 x 47.9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툴루즈 로트렉, 알린 길베르 부인, 1887,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티소의 <차>는 후경으로 강이 보이는 건물의 실내에서 차를 따라 옮기려는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티소가 영국에 가 있을 때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곧 배가 떠나는 선장과 이를 안타까워 하며 선장의 목을 껴안고 있는 그의 여자친구에게 차를 대접하는 장면을 그린 또다른 그림인 <안좋은 소식>에서의 한 쪽 부분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그림이다. 스토리가 있는 그림의 일부분을 잘라낸 셈이다.

툴루즈 로트렉은 인물화의 배경 요소로 찻잔을 활용하고 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다. 하지만 카셋의 그림과 제목 작명 형식만 다를 뿐 큰 차이는 없다. 모네의 경우도 정물로서 찻잔을 정갈하게 그린 그림 한 점이 있다.

클로드 모네, 찻잔 세트, 1872, 캔버스에 유채, 53 x 88 cm, 개인소장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차를 마시는 풍경은 근대 일상 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소재거리였다. 특히 실내 풍경을 많이 그린 카셋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차를 소재로 한 카셋의 그림들에 착안하여 그녀가 자라고 공부했던 곳인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는 “메리 카셋 티 룸”이라고 명명한 레스토랑이 현재 성업 중에 있다. 예술가는 명화만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림의 소재를 삼는 것만으로도 후대의 고향 지역민들에게 먹고 살 거리 하나를 더 선물로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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