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가. 그것은 때로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대면하기 싫은 고통스러운 일그러짐으로 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 수도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외면하고 싶은 기억들을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소환한다. 그의 그림은 다소 괴기스럽다. 특히 인물화를 보고 있노라면 보통의 인물화에 대한 기대를 배반하는 변형된 형상 앞에서 오래 눈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다. 파편화된 채 일그러진 얼굴에 흐물거리며 녹아내리는 신체, 심지어 동물이나 고기 덩어리같은 탈인간의 형상은 우리의 시선을 몹시 불편하게 만든다. 베이컨의 전략은 그림에서 구상을 걷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추상을 바로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은 어떠한 스토리나 에피소드를 담고 있지 않다. 형상은 철저하게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림에 보여지는 형상은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형상과는 다른 형상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구상을 들어낸 그림에서 남는 것은 변형된 형상 이외에 색상과 의도된 장치가 활용된다. 의도된 장치는 선이나 동그라미 또는 두께를 달리하는 다양한 스크래치와 같은 것들이다. 이 장치는 대상을 고립시켜서 집중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노린다.
<창문 앞의 두 형상>에서도 소실점을 향해 깊어지는 선들이 투시도인양 안으로 뻗어있는 가운데, 화면 전체가 암청색의 색조를 띠며 거친 붓의 터치가 강렬하게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화면 중앙의 어두운 부분에는 창- 창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으니 그렇지 이를 알고 있지 않으면 바로 식별하기는 어렵다-으로 보이는 공간에 밝게 표현된 형상이 있다. 바로 보아서는 한 사람이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두 사람인 것도 같지만 이 역시도 제목에서 두 형상이라고 하니 두 사람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심지어 가운데 공간이 진짜 창문인지 이를 둘러싼 주변 외곽이 벽인지 조차도 사실은 모호하다. 형상도 윤곽일 뿐 얼굴의 표정도 뭉개져 있고 부분적으로만 팔이며 얼굴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들 인물 형상이 친구 사이인지 아니면 연인 관계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자기분열의 상인지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재현이라는 패러다임은 그림의 대상이 실제 대상과 동일하다는 전제 아래 성립한다. 베이컨은 이 동일성의 담론을 무참하게 깨버린다. 그럼으로써 그림을 열린 공간으로 바꾼다. 이제 스토리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몫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몫이 된다. 변형된 형상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다가올 것이다. 이 점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 주려는 베이컨의 전략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은 대상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의 의미는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주어진다. 현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변형된 형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뭉개진 이미지에서 우리는 동일성의 틀에 갇히지 않은 자신의 기억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