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꿈꾸는 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시 Mar 09. 2016

차창 풍경

41 - 장샤오강

장샤오강, <차창-정전>, 2010,  캔버스에 유채, 140cm x 220cm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날 때, 그 여행의 설레임은 이윽고 기차가 출발하고 앉은 자리 차창으로 역의 풍광이 서서이 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가장 크게 요동친다. 드디어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요즈음의 열차는 워낙 고속이라 휙휙 지나가는 차창의 풍광들을 눈에 넣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멀리 있는 원경은 금방 지나가지 않고 그 공간적 거리만큼이나 아스라한 기억의 자락을 따라 우리를 상념에 빠지게 만든다. 차장 풍경을 떠올리면 늘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이다. 소설 앞 부분에 보면, 남자 주인공이 차창으로 비친 건너편 자리의 여자 승객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기차 여행중 터널을 지날 때 어두운 차창 거울로 반대편 승객들의 모습이 떠오르면, 항상 이 소설을 떠올리게 된다.


    장샤오강(Zhang Xiaogang: 1958~  )의 <차창> 시리즈는 열차의 창을 배경으로 다양한 풍경이나 대상을 다루고 있다.  그것들 역시 화가가 거쳐온 시대 환경과 자신의 개인사의 기억이나 꿈 들을 배경으로 한다. 그는 현대 중국의 상징주의 및 초현실주의 작가로서 "차이나 아방가르드"의 대표 작가중 하나이다. 국내에서도 몇 해 전에 전시회를 가진 적이 있다. 작품으로  <대가족> , <혈연> 등의 인물화 시리즈가 유명하다.  자신이 처한 시대의 정치적 무력감을 허무와 냉소적 코드로 풍자하고 있다. 심리적인 방식으로 중국의 현대 역사와 개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어 현대 중국의 정체성을 독특하게 그려내고 있다. 차창 시리즈는 차창을 일종의 무대장치로 활용한다. 기차 차장이 화면의 상단부로부터 거의 전체를 차지한 가운데 그 옆으로 차장의 커튼이 마치 무대의 막처럼 열려 있고, 하단에는 무대 객석인양 열차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다.  무대의 등장인물은 다양하다.  이들은 마치 차창 풍경이 지나가는 것처럼 화가가 주목하는 중국의 과거 시대상이나  특정한 내면심리를 표현한다.


    먼저 <차창: 정전>은 차창으로 스피커가 좌우로 두 대씩 달려있는 확성기 설치대가 서너 개 일렬로 연이어 보이고, 열차 좌석에는 두 남자가 서로 마주 한 채 탁자에 고개를 처박고 쓰러져 앉아 있다. 정전이라서 열차가 출발하지 못하고 무한정 대기중인가. 열차내에서 기다리다 지쳐 한 사람은 잠이 든 듯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머리를 부어잡은 채 고통스럽게 상황을 견디어내고 있다. 확성기가 상징하는 것은 억압적인 집단동원 체제일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머리를 깎인 채 획일적인 모습으로 무력감 속에서 철저하게 체제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잠들어 있거나 잠들지 않았다 해도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해 보려는 의지도 없이 자포자기한 모습을 반영한다. 회색톤의 우울한 색조에서 유독 머리를 감싸쥔 이의 색만 노란색으로 차별성을 부여했다. 그나마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반발과 저항의 단초가 배태되는 조건이라는 뜻인가.


장샤오강, <차창-학교>, 2010,  캔버스에 유채, 140cm x 220cm

    

    집단주의적 억압체제의 이면을 드러내는 주제의식은 <차창: 학교>에서 대상을 달리하여 다시 반복된다. 확성기 대신 학교가 차창을 가득 장악하며 집단적 동원체제를 상징할 뿐이다. 노란색의 학교는 위압적으로 차창을 크게 차지하고 있고,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다. 왜소한 농구대가 한쪽 구석에 밀려 자리하고 깃발 펄럭이는 게양대가 전면에 높다랗게 서 있다. 교사의 기둥과 교실의 창문들이 원근감을 보이며 병렬적으로 반복배열되어 있는 모습이 획일적인 집단주의 교육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변화가 있다. 좌석의 인물에게서 다른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겉모습은 똑같이 머리 깍인 채 회색톤의 획일적인 모양을 띠고 있지만, 탁자에 놓여 있는 카세트플레이어를 가지고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을 듣고 있다.  명시적으로 집단주의에 대립하는 개인의 사적 공간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사소한 개인 행위이지만 집단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탈주를 상징한다. 사적 공간으로의 개인적 은거에 불과하지만 이로부터 집단주의 체제 균열이 시작될 수 있다. 인물의 가슴으로 엷게 드리워져 있는 붉은 직사각면 또한 개인의 자유와 자율, 개성을 향한 열정의 싹틈을 상징한다.


장샤오강, <차창-외로운 바이올린>, 2010,  캔버스에 유채, 140cm x 220cm

    또다른 시리즈 작품인 <차창: 외로운 바이올린>에서는 이같은 개인의 사적 공간에서의 행위가 음악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형태로까지 발전한다. 차창에서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인물은 개인의 사적 공간에서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여가시간을 향유하고 있다. 따라서 차창 앞의 열차 좌석에는 별도의 인물이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 열차 내의 탁자 위에 놓인 플래쉬의 노란 조명 빛은 이 새로운 향유의 전망을 밝게 비추어 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조명 빛의 투사 각도만큼만 제한적이다.


장샤오강, <차창-홍매>, 2010,  캔버스에 유채, 140cm x 220cm


장샤오강, <차창-청송>, 2010,  캔버스에 유채, 140cm x 220cm

    <차창: 홍매>, <차창: 청송>에 이르면 이제 차창에 인물들은 모두 빠져 나간다. 차창 가득 붉은 매화나무나 푸른 소나무만 가득할 뿐이다. 차창 앞의 열차 좌석 가운데 탁자에도 주인을 기다리는 책 또는 찻잔만이 홀로 놓여 있다. 앞서의 <차창> 시리즈에서 차창은 과거를 회상하거나 고발하는 매개장치였다. 하지만 여기에 이르러서 차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향유이거나 미래의 이상을 매개하는 장치로 쓰이고 있다. 이제 관객들은 붉은 매화 꽃이나 푸른 솔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차창: 홍매>에서 열차 좌석에 사람 형상이 빠진 빈 외투만 앉아 있는데, 마치 관객들에게 그 빈 외투의 주인으로 와서 홍매를 감상하라고 초대하고 있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의 형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