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 펠리시앙 롭스
여인이 침대에서 옷을 벗고 모로 누워 책을 보고 있다. 침대에는 읽고 있는 책 이외에도 두어 권의 책이 더 떨어져 있다. 침대를 가리는 장막 위로는 흉칙한 모습의 뿔달린 악마가 책을 잔뜩 껴안고서 여인을 유혹하고 있다. 그림의 원제인 “Le Bibliothécaire”가 남성명사인 만큼 그림 제목의 <사서>는 바로 이 악마를 지칭한다. 악마가 유혹하는 책들은 어떤 책들인가.
한편으로 악마의 유혹을 받는 여인 역시 악의 꽃이기도 하다. 당시 19세기 말 유럽의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서 여자는 남자를 파멸시키고 세상에 악을 퍼뜨리는 팜프 파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책을 읽는 여인이야말로 지극히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악마의 유혹을 받는 여인은 다시 뭇남자를 유혹한다. 롭스는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와 교류하면서 그의 악마주의도 받아들여 이를 정교한 판화로 표현하였다. 그는 보들레르의 대표시집 '악의 꽃'의 삽화를 그렸다. 그에게 여성은 악마와 공범자이기도 하다.
펠리시앙 롭스(Felicien Rops: 1833 - 1898)는 나무르 태생의 벨기에 화가로 생애 대부분을 프랑스 파리에서 보냈다. 브뤼셀 대학에서 석판화를 전공하고 석판 풍자화와 에칭 삽화로 이름을 날렸다. 풍자신문인 "윌렌쉬피겔"에 풍자화를 기고하였으며, 국제에칭화가협회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창부 정치가(Pornocrates)'는 벌거벗은 채 눈을 가리고 돼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천박한 창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의 예술은 어둡고 초현실적이며 삶과 섹스, 악마적 요소들을 한데 뒤섞어 세기말 예술의 기괴하고 에로틱한 특징들을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그의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여성 묘사를 들어 그가 여성혐오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판화들은 포르노그라피처럼 난폭하게 적나라하면서도 과장되게 기괴하여 구토를 유발할 정도로 역겨운 묘사들도 상당하다. 하지만 그의 실제 생애를 보면 비록 나중에 아내와 떨어져 지내기는 했어도 정상적인 결혼도 하였고 부부 사이에 딸도 두었다. 또한 판화 이외의 다른 유화 그림에서 풍경화도 다수 그렸는데, 리얼리즘에 충실한 것이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정경이나 여성 인물들은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그려져 있다. 그의 이러한 이중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또다른 탐구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