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 안드레아스 히스
회청색의 거리 풍경이다. 낮은 층의 상점들이 전면에 있고 뒤로 높은 건물이 후경을 이루고 있다. 건물에는 직사각형의 크고 작은 창들이 바깥으로 나있어 건물의 선과 함께 그림의 기하학적 구도를 이룬다. 왼쪽 아래로 소실점이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 텅빈 거리이다. 그러다보니 사람의 부재는 자연히 침묵의 공간이 되었다.
말이 많은 세상이다. 말로써 흥하기도 하고 말로써 망하기도 한다. 신언서판이라고 말은 사람을 판단하는 주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언변이 좋다는 것은 시샘받을 만한 재주이기는 하지만 마냥 장점만은 아니다. 거꾸로 말없음 자체가 많은 말을 하기도 한다. 침묵시위가 그러하다. 말이 많다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된다.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만 있어야 하는 것이 말이다. 오죽하면 깨우침을 구하려는 방법으로 묵언수행이 다 있을까.
안드레아스 히스(Andreas His:1928~2011)는 바젤 태생의 스위스 화가이다. 거리 풍경은 히스의 그림 주제 가운데 하나로 일찍이 30대 초반인 1960년대에서부터 시작되어 50대 중반 이후인 1980년대까지 쭉 이어졌다. 이들 거리 풍경은 주로 파리의 거리를 그린 것들이 많고, 모두다 이 그림처럼 사람이 없는 텅빈 거리와 건물만 단색으로 등장한다. 그가 이 텅빈 거리와 건물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