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 툴루즈 로트렉
1896년 여름 툴루즈 로트렉은 프랑스 남서부 지방에 갈 일이 생겼다. 바다를 즐기기 위해 철도 여행보다는 르아브르에서 보드도까지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다카르행 증기선을 타기로 했다. 이 여행에는 와인업자 친구인 모리스 기베르가 동행하였다. 그는 이번 여행을 미식가의 유람여행 쯤으로 만들 생각에 바다가재를 비롯한 맛있는 음식들을 포도주와 곁들여 실껏 즐겼다. 그러다 보르도에 도착할 무렵 일이 되려고 그랬든지 뒤늦게 한 승객이 눈에 들어왔다.
우아한 모습의 이 여자 승객은 갑판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먼 바다를 보며 몽상에 빠져 있었다. 작은 끈이 달린 모자를 이마 위로 약간 기울여 쓴 이 금발의 여인을 보자 툴루즈 로트렉은 바로 매료되었다. 여인은 프랑스 식민지 관료의 아내로 남편을 만나러 아프리카 세네갈로 가는 길이었다. 툴루즈 로트렉이 이 여인에게 마음을 주고 어떻게 해 보려 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딱히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로트렉이 이 여승객과 같이 있기 위하여 일정을 바꾸어서 예정에 없던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여정을 늘였다는 사실이다. 동행했던 기베르는 어처구니가 없어 일정 변경을 반대하고 비난하였지만 로트렉은 막무가내였다.
예정에 없이 연장된 이 여행 덕분에 <54호실 승객>이 탄생하였다. 여인의 선실 번호가 54호였기 때문에 그림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서로 통성명도 못해 이 여인의 이름도 몰랐단 말인가 아니면 그냥 익명으로 남겨 두기 위해서 그렇게 작명한 것일까. 어쨌거나 로트렉은 이 여인과 함께 여행하면서 실현되지 않을 달콤한 공상을 즐겼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로트렉은 그 자신이 갈망했던 여인들과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그의 재주는 높이 샀지만 그의 왜소한 몸에 측은한 마음이었을 뿐 그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를 받아준 유일한 구원자는 독주 압생트였다.
리스본에 도착한 로트렉은 이 여인의 행선지까지 조금이라도 더 같이 가고 싶은 생각에 다시 아프리카까지 여행하자고 기베르를 설득하였지만 이번에는 그도 넘어가지 않았다. 상심한 로트렉은 배에서 내려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