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마리 로랑생
책읽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이 많아 그게 그것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들 화가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어 각기 구별되는 특성들을 갖는다. 이 그림 역시 독특한 특징을 보여 주는데, 무엇보다도 파스텔톤의 연한 색조가 유화임에도 수채화 같은 밝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형태도 많이 단순화되어 있어 거의 일러스트레이션 수준이다. 화사한 색상이 부가되면서 그림 속 인물은 현실에는 없는 환상 속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몽환적 존재로 바뀐다. 바로 이 점이 마리 로랑생 그림의 특징이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 - 1956)은 파리 태생의 프랑스 화가이다. 아카데미 앙베르에서 미술 공부를 하였다. 여기에서 같이 있던 브라크의 소개로 1906년 피카소가 주도하던 예술가 그룹이던 <바토 라부아르(세탁선)>의 동료들과 어울렸다. 이후 스페인에서 피카비아, 에른스트 등 다다이즘 동료들의 활동에도 동참하였다. 이런 연유로 큐비즘과 다다이즘과 연결되었지만 이에 빠지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였다. 특히 그녀는 담홍색이나 담청색, 담회색 등 파스텔 칼라와 흡사한 연한 담색조를 바탕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한 단순하면서도 감미로운 여성상을 그린 특유의 환상적인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그림 중 책읽기란 제목의 그림은 이외에도 여러 작품이 있다. 1906년에 연필로 그린 작품을 비롯해, 1914년에 종이에 연필과 잉크로 그린 작은 크기의 작품, 1924년의 동명 작품 등 다수 존재한다. 단색 드로잉을 제외하면 그림 속의 여인들은 책을 읽고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몽환성으로 인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네들은 마치 신화속의 님프와도 같다. 실제로 그녀 그림 중에는 님프를 그리고 작명에도 님프를 집어넣은 그림이 있다.
그녀의 그림 속 여인들은 나비인양 화사하게 나풀거린다. 만지면 바스라질 듯 유약하기만 하다. 그들은 우리가 현실 속으로 불러내는 존재가 아니다. 거꾸로 우리가 그들의 세계로 들어와 주길 기다린다. 마리 로랑생은 초현실주의나 상징주의의 환상성과는 또다른 환상을 보여 주었다.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비록 환상이 현실에서 무기력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림을 통해 환상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현실을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