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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 Mar 13. 2017

기도서에서 금서까지

93-브론치노

아뇰로 브론치노, 루크레치아 판치아티치의 초상, 1545, 판넬에 유채, 102 × 85 cm, 우피치미술관


그림의 주인공인 루크레치아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치가인 바르톨로메오 판치아티치의 아내이다. 이 초상화에 대해 조르지오 바사리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진짜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극찬하였다. 배경이 검은 공간으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은 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 대상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사용한 거리두기의 전략이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딱딱하게 굳어있다. 조금 아프거나 아니면 살짝 절망감이 묻어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입고 있는 의복이나 차고 있는 장신구는 상류층 여인임을 드러낼 뿐 아니라 상징을 통해 그녀의 우아한 품성을 보여준다.  금 목걸이에 새겨진 문구, "영원히 사랑하라"(Amour dure sans fin)는 사랑에 대한 당대의 준거이기도 하다. 그녀가 한 손을 대고 있는 책은 기도서쯤 되지 않을까 싶다.


아뇰로 브론치노(Agnolo Bronzino : 1503-1572)는 피렌체 태생의 이탈리아 화가이다. 30대 후반부터 피렌체의 대공인 코지모 데 메디치의 궁정 화가로서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였다. 초상화를 많이 그렸으며, 종교적이거나 우화적인 주제의 그림도 많다. 메디치 가의 초상화는 그가 직접 참여한 복사본도 많은데, 이는 외교적 선물로 활용되었다. 그는 매너리즘(Mannerism)의 대표 화가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매너리즘은 미술사 시대 구분에서 르네상스 미술에서 바로크 미술로 넘어가기 전에 나타났던 과도기적인 미술 양식을 말한다. 그 특징으로는 왜곡되고 늘어진 형상, 불명료한 구도, 양식적인 속임수와 기괴한 효과 등을 들 수 있다. 이 초상화에서도 목이나 손가락의 길이가 실제보다 과장되어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인체를 극도로 길게 늘이는 과장된 표현은 열광적 감정, 긴장과 부조화의 느낌, 신경 불안의 감각을 전달한다.


브론치노는 이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남편인 바르톨로메오 판치아티치의 초상화도 그렸다. 바르톨레메오 판치아티치는 피렌체의 무역회사를 소유한 프랑스 상인의 서자로 피렌체로 근거지를 옮겨 그곳에서 정치가로 성공하였다. 이 그림은 처음 피렌체로 옮겨와 한창 정치적 기반을 닦고 있을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 그는 프랑스 주재 영사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이때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가톨릭에서 금지하는 금서를 피렌체로 몰래 들여오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이단자로 몰려 체포되기도 하지만 더 이상 종교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전향서를 작성하고 풀려나 다시 정치적으로 재기하였다. 


신실한 신앙심을 보여주는 기도서는 아내의 초상화뿐 아니라 남편의 초상화에도 똑같이 등장한다.  남편의 경우에는 이같은 믿음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하는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가 지정한 금서에 대한 탐구로까지 이어졌다. 기독교 신구교간의 대립이 첨예하던 시기에 그런 연유로 잠시 핍박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다행히 전향을 통해 정치적 매장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배교를 강요하는 수준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쨌거나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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