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장 자크 에네르
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 나부(裸婦)의 몸은 어딘지도 불분명한 공간 한 가운데 하얗게 떠올라 있다. 그녀는 온통 책읽기에만 집중해 있다.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는 그 자체로 자족하다. 어떠한 의도도 없으며,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단지 공간에 떠올라 있을 뿐이다. 아니면 반대로 잠겨 있을 뿐이다. 신비로운 것들은 전혀 말을 건네지 않는다. 오로지 바라보는 이들의 일방적인 자문자답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답조차 전혀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신비하다. 그 봉인은 결코 해제되지 않는다.
장 자크 에네르(Jean-Jacques Henner: 1829 – 1905)는 알자스 지방의 베른윌러 태생의 프랑스 화가이다. 부드러운 필치로 많은 나부를 그렸다. 그림에서처럼 어둠침침한 배경에서 떠오르는 감미로운 육체 표현에 그만의 독특한 필법이 돋보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인 티치아노, 라파엘, 코레지오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종교적 주제의 그림이나 초상화를 많이 그렸으며, 그의 대표적인 초상화로는 <성녀 파비올라>가 유명하다. 파리 에콜데보자르에서 수학하였으며, 나중에 카롤루스 뒤랑과 함께 당시 에콜데보자르 입학이 불허되었던 여성들을 위해 "여성들의 화실"을 열어 운영하기도 하였다. 수잔 발라동이 그의 모델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당대 미술아카데미의 이상과 맞지 않았지만 나름 성공적인 경력에 만족하였다. 비평가들은 전통적인 역사화와 그를 비교하면서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그로서는 역사를 재구축할 어떤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림에서 서술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장식이나 의상과 같은 것에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나아가 정확한 형태 묘사나 소구적 관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림의 하얀 나신이 전혀 외설적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생 후반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아이콘이기도 한 <알자스, 그녀가 기다린다>나 <성녀 파비올라>의 판화나 복사본을 통해 유명세를 타며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미술사에 확실하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