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 루이 르 브로퀴
카펫에 앉아 한 여인이 책을 보고 있다. 보고 있는 책 이외에도 카펫에 다른 책들이 펼쳐져 있고 접힌 종이도 보인다. 장식이나 구도가 아니라면 여인은 아마도 이 책 저 책 뒤지며 무얼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과거 읽었던 어떤 문장이나 표현이 어림짐작으로만 생각나 정확한 그 내용을 확인해 볼 때가 있다. 그래도 금방 찾아지면 다행이지만 여기저기 뒤져도 나오지 않을 때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여인의 표정은 다소 침울해 보인다. 시선 또한 초점을 잃고서 다른 생각에 빠져 보이는 것 너머에 있다. 한 손으로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도 뭔가 불안하여 어디에 의지하고 싶은 심리를 드러내고 있다. 의상의 색깔조차 가라앉는 회색이다. <회색의 소녀>는 화가 루이 르 브로퀴가 20대 초반에 그린 초기작이다. 회색이 그의 관심을 끌었는지 30대 중후반의 5년 정도의 작품들은 모두 회색 일색이어서 화가의 작품 연대 구분에서 "회색 시기"로 명명된다. 이후 그 다음 5년은 다시 흰색에 매혹되어 흰색 일색의 작품을 그리고 있어 이 시기는 "흰색 시기"로 불리운다. 무채색의 연속 시리즈인 셈이다.
루이 르 브로퀴(Louis le Brocquy : 1916-2012)는 더블린 태생의 아일랜드 화가이다. 원래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으나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특이하게도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프란시스 베이컨, 사무엘 베켓, 셰이머스 히니 등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린 이들의 초상화가 유명하다. 자신의 그림이 생전에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의 영구소장품에 포함되는 영예를 최초이자 유일하게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