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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 Mar 17. 2017

시인의 고통

95-앨리스 닐

앨리스 닐, 케네스 피어링, 1935, 캔버스에 유채, 76.5 x 66 cm, 뉴욕 현대미술관


안경 쓴 남성이 흰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며 책을 보고 있다. 전후좌우 모든 배경에는 온갖 상황들이 어지러이 등장한다. 군데군데 불켜진 가로등이나 자동차 전조등, 전철 차장 불빛 등으로 보아 시간대는 밤이다. 뒷배경에 묘사되는 상황들은 어둠의 사건들이다. 왼쪽 상단은 밤거리 행인이나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오른쪽 상단은 누군가 소리질러 도움을 청하는 모습도 보이고 난폭한 경찰의 몽둥이질이 난무하며,  아예 거꾸로 추락하거나 엎어진 모습도 보인다. 아래쪽으로는 다리를 잃은 이가 목발을 짚고 걸어가고 있고, 휑한 눈의 해골처럼 묘사된 일단의 무리들이 좀비처럼 무기력하게 배회하고 있다. 어떤 이는 사고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다. 암울하거나 폭력적인 사태속에서도 사람들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생을 이어간다. 


이 그림은 한 시대의 자화상이다. 책을 읽는 인물은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케네스 피어링이다. 대공황기의 고통스러웠던 상황이 그 시대적 배경이다. 시인이 읽고 있는 책을 지탱하고 있는 생계방편의 그릇이 텅비어 있어 언제까지 책을 읽고 쓸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하다. 왼쪽 가슴에서는 죽음의 상징인 해골이 심장을 짓이기고 있어 선홍빛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있다.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는 시인의 고통스런 감수성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케네스 피어링은 대공황 시기 노동자 계급의 고통을 묘사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앨리스 닐 역시도 나이들어 뒤늦게 찾아온 영광에 앞서 긴세월을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견디어내는 생을 살았다.  그녀는 그 무렵 30대 중반으로 쿠바 출신 화가였던 첫남편과 헤어지고 그 사이에 난 딸도 빼앗긴 직후라 심신이 몹씨 피폐해져 있어 자살 시도까지 할 정도였다. 또 잠시 함께 지낸 선원 출신의 다른 남자친구로부터는 그가 제성질을 못이겨 집에 방화하는 바람에 자신의 그림 수 백점을 유실 당하는 만행을 겪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창작욕은 식지 않아, 고통이 고통을 서로 알아보았는지 내면적 고뇌까지도 잘 살린 초상화가 완성되었다. 시인은 그린니치 지역의 커피숍이나 바에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곤 하였는데, 화가는 그런 모델의 습벽까지도 감안해 작품에 반영하였다.  앨리스 닐은 이처럼 인물들의 특징을 잘 포착하는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그녀가 보기에 시인은 심장으로 고통을 느끼는 자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고통을 펜촉으로 풀어내지만, 화가는 붓끝으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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